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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영천사람 초재 정용채를 아시나요
최병식 편집국장
경북동부 관리자 기자 / d3388100@hanmail.net입력 : 2019년 05월 23일(목) 14:41
모 방송국 드라마 ‘녹두꽃’은 전봉준이 백성들과 봉기의 칼을 들고 민란을 일으키는 모습을 그리는데 인기가 꽤 높다. 19세기말 갑오년 전라도 고부에서 그랬듯이 우리 지역에도 그런 인물이 있었다. 영천을 사랑하고, 영천사람임을 자랑스러이 생각하는 이라면 이 정도 인물은 알아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에 정 초재를 소개한다. 이 이야기는 임란 영천성수복대첩기념사업회 정규정 회장으로부터 처음 들었다.

정 초재의 본관은 오천(烏川)이고 1824년 영천 교촌동 출생에 조교동에서 오래 살았다. 처음 이름이 용채(鏞采)이고 자는 서흥(瑞興)이며, 나중의 이름은 유규(裕圭), 호는 운남(雲南)으로 고쳤으며, 초재(草齋)는 공의 처음 호다. 선비로서 유능한 인재로 명망이 높았으나, 찢어질 정도로 가난한 삶을 살았다. 그의 유일한 삶의 수단은 어머니와 그의 부인이 길삼을 하고, 자기는 짚신을 삼아 팔아서 하루하루 생계를 꾸려 가는 것이었다. 당시는 시절마저 어수선한 정치상황일 때였다.

고종 27년이니까 1890년 영천에 홍용관(洪用觀)이라는 군수가 부임을 한다. 이 군수는 고부의 조병갑처럼 민생문제는 제쳐놓고, 결세(結稅)와 부세(賦稅)를 과중하게 하고 주민 착취를 일삼으니 학정에 신음하던 군민들의 원성이 하늘에 닿을 정도였다. 이에 평소부터 불의와 타협하기 싫어하는 의협심 많은 선비로 주민들의 추앙을 받고 있던 초재는 군수 축출을 결심하고 몰래 백성들과 모의를 하였다. 소식을 듣고 호응하며 몰려든 군중들에 의하여 갑오년인 1894년 7월 드디어 동헌으로 들어가 홍군수를 사립문짝에다 싣고 군위땅(지금 영천의 화룡동 옹기굴 너머 도로옆 당시 논 150평이 군위땅이었다 함)에다 내쫒아버렸다. 그때는 군 경계 밖으로 쫒겨난 관원은 다시 복직을 할 수 없다는 관습에 따라 홍군수는 그냥 달아났지만 초재의 지방관헌에 항거한 죄는 벗을 길이 없었다. 주모자를 체포하라는 명이 떨어졌고 그 명을 받고 내려온 나졸들에 의해 잡힌 사람들은 서울로 압송되어 모두 처벌을 당했다. 그러나 초재는 탐관오리는 백성의 원수일 뿐만아니라 나라를 좀먹는 역적과 다름이 없는데 시비곡절을 가리지 않고 보복만을 일삼는 정치에는 달아나는 것이 상책이라는 판단에 피신을 하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조선왕조 신록에도 나오는데 그 유명한 ‘영천민란사건’이다. 잠시 신록을 펼쳐보자. 고종실록 32권에 “이번에 영천 백성들이 소요를 일으킨 것은 (중략) 화란을 일으키기 좋아하는 무리들이 뒤따라 모여들어 민가를 불사르고 관아에 함부로 뛰어들었으며 심지어 수령을 들어다 내버리는 변고까지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분수를 어기고 기강을 위반하여 스스로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나온다.

또, “정용채는 본래 소문난 불량배로서 온 고을이 모두 죽여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번에 또 앞장서서 소요를 일으켰으니 만 번 죽여도 오히려 가볍습니다. 그런데 지금 도망쳤으니 기한을 정하고 체포하여 즉시 사형에 처하도록 명령해야 할 것입니다.” “전 군수 홍용관은 여러 번 수령을 지내면서 백성을 괴롭히는 짓을 모질게 하였으므로 온 경내에서 원한이 오랫동안 쌓여 결국 전에 없는 변고를 당하였으니 응당 중하게 처벌해야 할 것이며 탐오한 돈이 많으니 법무아문(法務衙門)에서 받아내게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적고 있다.

이렇게 하는 동안 세월은 흘러 1년이 넘었고 초재는 자연적으로 사면이 되니 이는 그의 놀라운 수완도 있었겠지만 지역에서 얻은 인심 때문에 그를 안타까이 여겨 숨겨주는 사람들이 많은 덕 아니겠느냐고 말하고 있다.

포부를 다 펴지 못하고 초야에서 일생을 보냈지만 을사늑약후에 각처에서 의병(산남의진)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내 나이 60만 되었더라면 나라 위해 한번 싸워나 볼걸”이라고 탄식을 했다고 한다. 그의 나이 80이 넘었을 때다. 이같이 공은 어떤 일에 처해도 당황함 없이 여유있고, 사리에 맞는 일만 하며 강개한 결기와 의협심으로 믿고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또한 백일장 같은 글짓기 모임에 시관(試官)을 도맡았던 걸로 보아 학문도 탁월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정 초재라고 하면 당시에 젖투정을 하던 어린애도 울음을 그쳤다는 말이 항간에 유명했단다. 그가 얼마나 가난했는지는 굶기를 부자 밥먹듯 했다니 알만하다. 영천에 이런 사람이 있었음을 알고 초재에 대해 좀더 알고 싶다면 ‘영일정씨 영천화수회’ 인터넷 카페에서 확인할 수 있다.
경북동부 관리자 기자  d338810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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