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59년 사월 초파일 부처님 오신날을 봉축하는 등불을 밝히며, 온누리에 부처님 은덕을 기리는 좋은 덕을 지은 분들은 이 선근공덕으로 후세까지 좋은 인연이 이어질 것입니다.
오늘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여 불자님들께 드리고 싶은 말씀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오늘 우리가 맺은 인연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 알고 이러한 인연을 소중히 하시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불자로서 부처님과 맺은 이 이연을 소중히 하여 더욱 부처님의 향기를 널리 퍼뜨리는 불자가 되시라는 것입니다.
인연의 귀함과 소중함을 안다면 인연에 소홀하거나 함부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에서 불교가 시작됩니다. ‘법망경’에 전생에 좋은 과보를 맺은 사람간의 만남을 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1천겁에 한 나라에 태어나고, 2천겁에 하루 동안 길을 동행하며, 3천겁에 하룻 밤을 한 집에서 지내며, 4천겁에 한 민족으로 태어나고, 5천겁에 한 동네에서 태어나며, 6천겁에 하룻밤을 같이 잔다고 했습니다.
7천겁에 부부가 되고, 8천겁에 부모와 자식이 되며, 9천겁에 형제자매가 되고, 1만겁에 스승과 제자가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이렇게 지어 온 선근인연 덕분입니다. 아주 귀하고 귀한 인연이 아닐 수 없지요. 특히 우리 모두는 부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이 인연은 1만겁 이상을 잇는 인연의 결과지요. 육신은 부모님으로부터 받지만, 마음의 깨우침은 참된 스승의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마음의 스승을 찾아 불자로서 한 자리에 앉은 우리의 인연은 참으로 귀중한 인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듯 1겁에서 1만겁의 시간을 지나온 인연은 ‘일기일회(一期一回)’라 하여 평생의 단 한 번의 만남이자 내 생애 단 한번뿐인 일이기에 불교에서는 옷깃만 스친 인연이라도 함부로 하지 말라고 합니다.
오늘의 인(因)은 내일의 연(緣)이 됩니다. 따라서 지금 내가 어디에 누구와 있든지 간에 이 인연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아주 가까운 사람과의 인연을 소홀히 합니다. 그리고 이곳저곳의 절을 다니며 어디에 나에게 행복을 줄 부처님이 계신가 찾습니다.
불상에 부처님이 계신다는 생각만 갖고 절을 다니며 부처님을 찾는건 불자다운 자세가 아닙니다. 오늘 내 곁에 있는 사람을 부처로 생각하고 귀하게 만나는 게 불자다운 자세입니다.
해인사 장경각 법보전 주련에 ‘부처님 계신 곳이 어디인가. 지금 그대가 서 있는 바로 그 자리’라는 글귀가 있습니다.
부처님이 어디에 따로 계신 것이 아니라 내가 있는 곳에 있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있는 자리만 남보다 더 불편하고, 남들 때문에 내가 행복하지 않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환경 중에서 우리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건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입니다. 누가 옆에 있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이 달라질 수 있지요.
맹자의 어머니가 아들 교육을 위해 집을 세 번이나 옮겼다는 ‘맹모삼천지교’는 환경의 중요성을 알려줍니다.
또한 묵을 가까이 하면 검어진다는 ‘근묵자흑(近墨者黑)도 나쁜 사람, 옳지 않은 사람들과 어울리면 그 영향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부처님께서 사와티의 기원정사에 계실 때 하늘 신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많은 신과 인간들은 모두 행복을 바라면서 축복에 대하여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으뜸가는 축복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자 부처님께서 “어리석은 사람과 가까이 하지 않고 지혜로운 사람과 가까이 하며 공경할 만한 사람을 공경하는 것, 이것이 으뜸가는 축복이다”.
부처님을 스승삼은 불자로서 이 자리에 모인 우리는 아주 축복받은 사람들끼리 모인 것입니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끼리는 눈빛으로든, 나누는 대화로든 행복이 보이지 않게 서로서로 전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 행복한 교류가 우리 불자들끼리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널리 이웃과 사회에 전달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부처님은 행복을 전염시키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부처님이 어디에 계신가 찾아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또한 절에 부처님이 계시니 절에 다녀야 극락간다고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부처님이 진리를 깨달아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가르침을 주셔서 그 법향이 오늘날까지 전해졌듯이 내가 부처가 되어 그 법향을 널리 전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부처님 오신 날 진정으로 새겨봐야 할 가르침은 바로 내가 부처가 되어 행복을 전염시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부디 서로가 행복을 전염시킬 수 있는 좋은 인연으로 함께하길 바랍니다.
<충효사 주지 해공 큰스님 인터뷰>
-지장기도의 성지로 알려진 충효사에 지장신앙을 전파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보현산은 영천시 화북면과 청송군 현서면에 걸쳐 있으면서 이 지역의 산들을 이끄는 모습이라서 모자산(母子山)이라고도 불리우고 있습니다.
이러한 부처님의 뜻을 펼치기 위해서는 옛적에 모자산이라 불린 보현산에 지장도량을 만들어 효사상을 전하는 것이 알맞은 포교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찰이름도 나라를 위한 기도, 부모를 생각하는 기도도량이라 하여 충효사라고 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충효사는 어머니같은 마음, 즉 자비사상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지장신앙으로 중생을 제도하면서 부처님의 뜻을 펼쳐가는 마음의 기도 도량인 것이지요.
-자비사상으로 중생을 제도한다면 관음신앙도 있고, 미타신앙도 있는데 왜 지장신앙을 강조하시게 된 것인가요?
우리나라는 4대 신앙관을 갖고 있습니다. 내세의 행복을 위해 극락정토로 가는 미타신앙, 중생을 구제한다는 구제신앙으로서의 관음신앙, 그리고 부처님이 다시 이 땅에 오신다는 미륵신앙, 절망의 상태에서 구제되고자 하는 지장신앙이 한국의 4대신앙입니다.
이 중에 지장신앙은 민간 신앙을 대변할 정도로 신행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지장보살은 육도 윤회하는 중생들을 모두 제도하겠다는 원력을 세우시고 언제 어디서나 끊임없이 보살행을 실천하고 계십니다. 특히 지장보살은 가장 고통이 가혹한 지옥중생을 모두 제도하여 깨달음에 이르게 하지 않는 한 자신은 결코 성불하지 않겠다는 원을 세우신 보살이십니다.
그래서 저승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민간신앙에의지한 대중들을 위해 재래의 명부시와 신앙과 습합된 지장신앙으로 중생들에게 자비사상과 효사상을 심어주고자 충효사를 지장기도도량으로 가꾼 것입니다.
-충효사의 상징적인 건물은 삼세보전으로 알고 있습니다. 보통 절에 가면 대웅전 혹은 대웅보전이라고 하는데 삼세보전이라 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일반 사찰에는 대웅전이 있지요. 그곳엔 본존불인 석가모니불이 있고,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좌우에 봉안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충효사 삼세보전에는 부처님의 과거불인 연등불, 현재불인 석가모니불, 미래불인 미륵부처님을 모시고 있지요. 다시말해 과거세, 현재세, 미래세 등 삼세의 부처님을 모두 모신 전각이라서 삼세보전이라 한 것입니다.
-일천지장보살 목탱으로 이루어진 위모설법전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나요?
위모설법전은 부처님께서 도리천궁에서 어머니를 위해 설법하셨다는 내용은 ‘지장경’에 자세하게 설명돼 있습니다. 지장경이 금강경 법화경 화엄경과 다른 점이 있다면 금강경 법화경 화엄경에는 성문제자들, 보살제자들, 재가불자들이 나오지만 ‘지장경’에 그 부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장소가 지상이 아니라 하늘나라인 욕계2천인 도리천이기 때문이지요. 도리천에서 싯다르타 태자를 낳고 일주일만에 도솔천에 가신 어머니를 위해 법문하신 과정이 위모설법입니다.
우리 충효사의 위모설법전은 다른 곳에서 보기 어려운 특이한 상징이 있습니다. 가로 9m, 세로 2.7m 안에 일천 분의 부처님이 서로 다른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고, 하단에는 아미타삼존불과 극락세계가 조각되어 있습니다.
국내 최고 무형문화재 불화장이신 석정스님께서 3년 동안 심혈을 기울이신 것으로, 전세계에서 가장 불단장식성이 뛰어난 작품이지요.
-이렇게 세계적으로 희귀한 위모설법전을 기획하신 것에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일반적으로 법당하면 그냥 부처님을 모신 집으로만 생각하는데 사실 법당은 단순한 집이 아닙니다. 법을 깨우치는 전각이지요. 훌륭한 부처님의 세계를 그 작은 공간속에 옮겨 함축성있게 묘사한 건물이 법당입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 어느 곳에 내어 놓아도 손색없을 만큼 장중하고 화려하고 장엄하게 만듭니다.
도리천에서 부처님이 어머니께 설법하셨던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곳엔 부처님과 어머님만 단 둘이 앉아 있는 게 아닙니다. 부처님이 데리고 간 제자들과 어머님께 법을 전하시는 부처님을 뵙고 설법을 들으며 깨우치려고 수많은 신들이 함께 모입니다.
부처님의 어머니인 마야부인과 함께 부처님의 법을 듣고자 모인 분들이 부처님을 모시는 자리를 만들게 되지요. 그게 바로 수미단입니다. 그리고 그 수미단 아래서 부처님 법을 듣게 됩니다.
이 모습이 담긴 것이 위모설법전이고, 법당은 이러한 위모설법에 근거하여 마련된 전각입니다. 따라서 위모설법전이야말로 법당의 본래 의미를 잘 담고 있는 것이라서, 여러 중생들이 이 의미를 이해하고 법당에서 법문을 듣고 깨달으시라는 의미로 삼세보전에 위모설법전을 마련한 것입니다.
-충효사는 많은 지장보살님이 모셔져 있습니다. 특히 육지장보살상이 인상적인데, 육지장에는 어떤 의미가 있나요?
지장보살님은 육도 즉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의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백천가지 모습으로 나투시어 구제하십니다. 그 대표적인 시현이 육지장이지요.
천상계를 구원하시는 일광지장, 인간계를 구원하시는 제계지장, 아수라계를 구원하시는 지지지장, 축생계를 구원하시는 보인지장, 아귀계를 구원하시는 보주지장, 지옥계를 구원하시는 단타지장입니다. 이렇게 육도의 여기저기를 부처님 법으로 구원하고 교화하시기 위해 나투시므로 육지장이라 이름한 것입니다.
-지장보살님은 다른 보살상과 달리 매우 친근한 이미지가 있습니다. 이러한 이미지를 갖고 계시는 것에도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까?
지장보살님은 중생들을 자각시키고 참회시키기 위해 다양한 모습으로 다양한 공간에 나타나십니다. 여기에는 법신, 보신, 화신이라는 삼신사상의 논리가 적용되지요. 즉 고통의 현장에서 악업의 사슬을 끊지 못하는 중생들을 교화하고, 구제하려는 분이라서 중생의 고통을 함께 하겠다는 동체대비의 사상을 그대로 보여주시는 분입니다.
때문에 지장보살의 모습은 중생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친밀하고 소박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흔히 지장보살은 삭발한 머리에 가사를 걸치고, 지팡이를 짚거나 보주를 들고 있는 모습입니다. 유일하게 지장보살상만이 인간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지요.
-지장보살님이 갖고 계시는 보주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습니까?
지장은 범어로 ‘쿠시타가루바’라고 합니다. ‘쿠시타’는 자궁, 저장이라는 말로 대지(땅)를 의미합니다. 대지는 모든 생명의 씨앗을 간직해서 때가 되면 꽃을 피워 열매를 맺게 해주지요? 이처럼 모든 삼라만상을 길러내고 품어주는 어머니같은 역학을 지장보살이 합니다. 지장보살 왼손의 보주(여의주)는 이러한 대지의 힘과 풍요함, 어머니의 자비를 품은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장보살님 옆에는 두 분이 항상 계시는데 이 분들은 어떤 분들인가요?
왼쪽에 계신 분이 도명존자시고, 오른쪽에 계신 분이 무독귀왕이십니다. 지장부처님의 협시보살이시지요.
지장보살의 대원력을 모신 전각에서는 지장보살 좌우에 도명 존자와 무독귀왕을 협시로 봉안합니다. 좌우에서 지장보살님을 모시면서 중생구제의 본원을 돕는 분들이지요.(중략) 이렇게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은 지장보살과 인연이 되신 분들이라 가까이서 지장보살의 대원력을 돕고 계신데 이 세 분을 지장삼존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태중 영가를 위한 자리도 인상적입니다. 어머니 품속같은 지장보살님 곁에서 영가들이 잘 천도될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로 이 자리를 만드신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인연이 맞지 않아 태어나지 못한 태중 영가들의 영혼을 위해 천도재를 꾸준히 지내고 있습니다. 신도님들을 상담하다보면 불자들이 죄업에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럴 때 천도되지 못해서 슬픈 태아 영혼들을 정성껏 천도하고 나면 어려움이 풀리고 해결되는 일들이 많아요.
불교는 어느 종교에서 볼 수 없는 태아에 대한 교설이 불전에 기록돼 있습니다. 태아를 한 인간으로서 주체성을 인정하고 있지요. 그래서 경전에 “태아를 죽인 죄를 지었더라도 부처님과 불법을 통해 지성으로 참회하고 태아의 영혼을 위해 지성으로 천도 공양하면 죄업이 소멸되고 이고득락한다”고 이르고 있습니다.
즉, 태 속의 생명이 얼마나 존귀한 것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고, 참회와 발원을 통해 근본적인 참괴심을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태아의 생명존중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하여 인식시키기 위해서라도 태아의 영혼 천도는 불교에서 아주 중요한 의식입니다.
-그 외에도 충효사에는 노천에 수백의 지장보살님 모셔져 있는데 이렇게 많은 분을 모신 이유가 있나요?
이제는 불자들 스스로가 지극한 마음으로 귀의하고 보살행을 행하는 지장보살이 되어야 할 때이지요. 그러면 지장보살의 가피가 처처에 나투고 실현됩니다. 그래서 불자 한 분이 한 분의 지장보살을 모시고 지장보살님처럼 중생을 구제하는 자비보살행을 실천하시라는 의미에서 이렇게 많은 분들을 모시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지장보살님을 개인의 이름으로 모신 분들은 지장보살님을 모신 그 자체만으로도 업장소멸에 공덕이 될 뿐아니라 스스로 본인도 지장보살처럼 살아야겠다는 마음가짐을 갖게되어 보살행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되지요.
처음엔 내 고통 때문에 고통을 소멸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지장보살님을 모시지만 차츰 남의 고통까지 어루만져주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건 아주 중요한 일이지요. 불자들이 이기적인 삶의 태도를 반성하고 대승보살의 삶을 발원하며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렇게 본인만의 지장보살을 모시게 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