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이 후일 전쟁의 패인을 분석하면서 “우리가 영천을 점령했을때 승리할 수 있었고, 영천을 상실함으로써 패배했다”고 말할 정도로 영천전투는 6.25전쟁의 분수령이었다.
영천 전투는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경북 영천에서 국군과 북한군이 벌인 낙동강 전선 마지막 대전투로 처음에는 영천이 함락되어 최악의 상황에 이르렀으나 반격을 하여 영천을 탈환하고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어 전세를 역전시켰다.
9월 5일 북한군 15사단은 비가 내리는 가운데 3개 방면에서 공격했다. 국군 방어선을 뚫고 영천 동북쪽의 고경면 단포동을 점령했다. 9월 6일 새벽 3시에는 적이 영천 시내 전체를 점령했다. 낙동강 방어전이 시작된 이래 국군 방어지역에 이 정도의 구멍이 난 것은 처음이었다.
전선 붕괴 직전의 위기에서 유재흥 국군 2군단장은 결단을 내렸다. 우선 국군 8사단을 영천 동남쪽 금호강변에 배치해 적 15사단의 움직임을 견제했다. 그리고는 국군 1사단과 6사단에서 1개 연대씩의 병력을 차출해 7사단과 함께 영천을 공격하도록 했다. 두 차례나 뺏고 뺏기는 혈전이 벌어졌다. 낮에는 국군, 밤에는 인민군. 낮에는 화력전, 밤에는 백병전 식의 처절한 전투가 3일 동안이나 계속됐다.
9월 9일 국군 2군단은 8사단 16연대와 21연대, 7사단 5연대와 8연대, 1사단 11연대와 6사단 19연대 등 영천 일대에 주둔하고 있던 6개 연대를 모조리 공격에 투입했다. 북한군을 완전히 감싸며 포위망을 구축한 국군 2군단은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결과는 극적이었다. 국군은 일거에 영천을 완전 탈환하고 영천 북쪽까지 밀고 올라갔다. 적 15사단은 4000여 명 이상이 전사하는 등 사실상 전투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에서 와해돼 버렸다. 이처럼 낙동강전선 붕괴라는 최악의 위기 순간을 극적인 승리로 전환시킨 영천 전투는 이후 국군과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을 감행, 반격으로 전환할 수 있는 발판이 됐다.
<6.25참전유공자회 영천시지회 박상대회장 인터뷰>“7사단 5연대 소속으로 영천 보현산전투에 투입돼 적과 싸웠습니다” 1950년 8월부터 9월까지 영천전투 참전용사인 6.25참전유공자회 영천시지회 박상대회장의 말이다. 1950년 8월15일 열아홉살 나이에 자진입대후 곧바로 전쟁에 참가한 것이 보현산 전투였다고 말했다.
“입대 당일 몇십명의 동기들과 함께 현장에서 엠원소총 분해결합과 8발 실탄사격을 딱 한번씩 실시한 후 곧바로 전장에 투입됐다”는 박회장은 계급도 군번도 없이 즉석에서 피묻은 소총 하나씩 지급받아 바로 전선으로 나갔다는 것이다.
박회장은 “군복은 물론 군화 철모도 없이 민간인 복장 그대로 전장에 나간 저희 동료들은 전투중 쓰러진 전우의 군화를 벗겨 신고, 칡넝쿨로 위장하는 등 보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며 당시상황을 설명하면서 “무엇보다 배고픔과 잠이 모자라는 것이 가장 고통스러웠다”고 회상했다.
“연일 계속되는 주야간 전투로 잠이 모자라는 병사들이 행군중 픽픽 소리가 나면 잠에 취해 쓰러지는 경우로 그대로 쓰러져 자다가 포로가 돼 버린 사례가 많았다”고 회고하는 박회장은 “행군중 잠시 휴식시간에 소마굿간에서 쉬다가 깜빡 잠이들어 일행을 놓쳤으나 소대장이 다시 돌아와 깨워주는 바람에 지금 이 자리에 있다”고 자신의 경우도 들려준다.
박회장은 1950년 6.25직전 서울 친척집에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야간학교를 다니며 주경야독의 생활을 하다가 전쟁이 발발하자 외가인 선산을 거쳐 신녕강변에서 천막치고 피난생활하던 중 8월15일 홀로 자진입대했다. “신녕강변 천막촌 피난살이 당시 부모들이 나이도 어린데 어디 갈려고 하느냐는 부모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진 입대했다”는 박회장은 “죽을 목숨이라면 피난하며 민간인 신분으로서도 죽을 수 있고 살아날 목숨이라면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군인으로서도 살아날 것이라는 마음으로 입대했다“고 입대당시의 심경을 피력했다. “사실 6.25 직후 갑작스런 적의 침공으로 큰 피해를 입었던 아군의 병력손실을 메꾸기 위해 민방위대원들이 매일 새벽마다 신녕강변 피난민 천막촌을 돌며 청장년 장정들을 붙잡아 강제입대시키는 분위기였다”는 것.
“적과의 교전당시 자신이 쏜 총알에 적군이 쓰러지면 기분이 좋았지만 그러지 않으면 기분이 좋지 않았다“며 10대 후반의 겁도 없이 전장에 뛰어든 젊은 혈기를 되돌아 보는 박회장은 공격작전시 방금 지나왔던 지점에 진입했던 전우가 픽 쓰러지는 경우 ”조금 전의 나를 조준했던 적군의 총알이 저 전우를 쓰러뜨린다“는 생각에 등골이 오싹했다고 말했다.
“적군의 대대적인 공습때 참호속에서 머리를 처박고 있다가 진격해 온 적군의 포로로 잡힌 어린 전우들이 적지않았다”며 그때 상황을 생생히 기억해 내기도 헸다.
“척후병으로 적진 바로 가까이 바위 밑까지 침투해 ‘손들고 내려오라’고 외치면 상대편에서 ‘까불지말고 손들고 올라 오라우’라는 응답이 왔다”며 당시 일화를 들려주는 박회장은 “요즘 전후세대들이 굶주림과 헐벗음의 고통속에서도 나라를 지켜냈던 그 처절한 6.25전쟁의 실상을 잘 모를뿐 아니라 안보의식이 희미해 지는 것 같다”며 안타까움을 표한다.
“초중고 학생들의 경우 6.25발발 연도조차 모르는 것은 물론 심지어 6.25가 북침인 것으로 알고 있더라”며 안타까워 하는 박회장은 “일반 성인들 조차 휴전일인 7월27일이 무슨 날인지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며 이를 타개하기 위한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했다고.
“그래서 매년 6.25를 앞두고 초중고교나 기업체, 군부대를 순회하면서 6.25 바로알리기 운동을 벌이고 있다”는 박회장은 “올해는 메르스 때문에 저 혼자만 서울서 내려온 전문강사님과 함께 지난 16일 성남여고를 찾아가 6.25바로알리기 교육을 실시했다”고 밝힌다.
매년 지역내 2개 학교를 선정한 순회교육과 더불어 기업체나 군부대 등 교육요청에 응하고 있다는 6.25 바로 알리기 교육은 6.25당시 전투장면이나 참상을 영상을 통해 알리고 전문강사의 6.25강의로 진행되는데 이때 영천시지회 산하 16개 읍면동 분회장들이 복장을 갖춰입고 동행하는 자체가 학생들이나 젊은 군인들에게 산교육이 되고 있다 말했다.
그러나 올해의 경우 포항 포스코나 , 205특공단, 3사관학교(23일) 등지에서 교육요청이 왔으나 메르스 때문에 모두 취소되고 성남여고만 다녀왔다고. 회원 대부분이 80대 중후반인 노병들이라 면역력이 떨어져 학교측에서 노병들의 출입을 자제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박회장은 교육을 받고 난 학생들이 “그동안 잘 몰랐던 6.25의 참상이나 전쟁발발 상황을 제대로 알게됐다”는 반응을 보일때 보람을 느낀다며 웃음짓는다. 6.25참전 유공자회 영천시지회는 2000년 결성 당시 1470여명이었던 회원들이 고령이라 2015년 현재 절반이하인 620여명으로 대폭 줄어든 상황이다. 자신이 이미 80대 초반인 박회장은 “대부분의 회원들이 80대 중후반 이상 고령이라 16개 읍면 분회장들에게 매일 소속 회원들에게 일일이 안부전화를 해달라고 부탁하고 잇다”고 밝힌다. 박회장은 “독거노인이 된 상당수 6.25 참전 전우들의 노후생활에 대한 지역민의 관심”을 당부했다. <최홍국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