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남의진은 구 한말 항일운동의 대표적 의병진영으로 1905년 강제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일제의 침탈에 항거해 영천을 중심으로 경북 남동부 일대에서 떨친 의병진이다.
구한말 1905년 강제로 체결된 을사늑약으로 일제가 침탈해 왔을 때 구국의 뜻을 담은 고종황제의 밀지를 품고 분연히 의병을 일으킨 산남의진 의병대 정환직 대장과 그 아들 정용기 대장은 영천 자양면 출신이다.
고종은 을사늑약 후 당시 태의원시종관(太醫院侍從官)으로 있던 동엄(東嚴) 정환직 선생을 불러 ‘의병을 모아 일본으로부터 나라를 구해달라’는 요지의 밀지를 내린다. 정환직 선생의 아들 정용기가 영천에서 산남의진을 첫 결성, 대장으로 의병활동을 이끈 후 다시 정환직과 포항 흥해 출신의 최세윤으로 맥이 이어지면서 구한말 최대의 항일의병진을 갖추게 됐다.
산남의진은 병오의병의 대표적 의진으로 항일의병항쟁사에 있어 그 규모나 조직면에서 대진영이었다.정용기 의병대장 추대1905년 12월5일 정환직은 아들 정용기 에게 의병을 모집해 강원도 금광평으로 집결토록 하고, 정환직은 서울과 영남일대를 돌면서 은사(隱士)들을 만나 거사를 도모한 후 상경했다.이때 고종황제로부터 군자금 5만냥, 전 참찬 허위로부터 퇴관 동료들의 모금액 2만냥과 사재 2만냥으로 무기를 구입하기위해 1906년 2월 청나라 사람 왕심정을 중국으로 급파했다.
아들 정용기는 부친의 명을 받고 귀향해 이한구, 정순기, 손영각 등과 항의소를 영천에 설치하고 의병을 모집했다.1906년 3월초 1천여명의 의병들로부터 대장으로 추대된 정환직은 진명을 산남의진이라 정하고 24개 고을에 79명의 의병장을 임명해, 각 군에 파견하고, 부서와 조직을 편성했다.
이때 ‘나라가 왜적에 어려서 수운이 강산에 감돌 때/…/조국을 찾고자 용감히 의기를 들었네’란 의병 사상 처음으로 군가를 제작해 부르게 해 의병들의 사기를 높였다.
3월4일 산남의진은 동해안을 따라 일본 수비대를 공격하며 북상 중 신돌석 의병진이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패했다는 첩보를 받은 정용기는 신돌석 의병진 지원을 위해 수백명의 병력을 차출해 포항시 신광면을 지날때 대구진위대 경주분견대장 신석호의 간계로 일본군에 체포돼 대구 감옥에 이송됐다.이후 정용기는 수차례 귀순권유를 받았으나 끝내 거부하고 오히려 옥중에서도 적의 주둔지를 정탐해 중군장 이한구에세 밀지를 보내 공격토록 명령했다.
정환직은 1906년 9월 고종황제의 명으로 아들 정용기가 석방되자 옥고로 인해 와병중인 아들을 만나 사재를 정리해 군자금을 주어 의병 본진을 강릉으로 정하고, 관동 서북등지에서 동지를 규합해 의병을 모집했다. 또 화약제조법을 가르쳐 북상해 오는 산남의진을 맞을 준비를 했고, 서울 주요거리에는 격문을 붙여 반일 애국사상을 고취 시키고 군자금을 조달하는 등 눈부신 활약을 했다.산남의진 열악한 무기로 일본군 대응일본군의 무기는 자동소총인 반면 의병들의 무기는 화승총이라 우기에는 제대로 격발 되지않아 전투에 어려움을 겪었다. 8월에는 총포 및 화약단속법이 발효되어 무기와 탄약을 구할 수 없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당시 일제의 군대 해산 만행으로 백산 우재룡 선생과 김성일을 비롯한 해산 군인들이 신무기를 갖고 산남의진에 입진해 전세는 한층 강화됐다.
이때 의병을 토벌하기 위해 일본에서 급파된 정규군인 보병14연대는 산남의진을 정중군, 영천당이라 부르며, 산남의진을 섬멸키 위해 입암에 진을 치고 있다는 정보가 입수되자 즉시 매복작전에 들어가 9월1일 새벽에 기습공격을 전개했다.
산남의진은 일본군의 역습을 받아 용전분투했으나 대장인 정용기를 비롯해 중군장 이한구, 참모장 손영각 등 수십명의 참모와 많은 의병들이 전사했다. 격전지역 일대 가옥들은 모두 소실되고 양민들의 가산은 모두 약탈 당하는 등 한말 의병 항전사상 최대의 격전지가 된 대표적인 전투였다.아버지 정환직 대장 영덕 등지서 대승정환직은 전사한 아들의 뒤를 이어 산남의진 대장에 추대됐다.정환직은 보현산을 근거로 흩어진 의병들을 집결 시키고 여러 장령과 종사들을 대구와 부산 등지의 철도 공사장에 보내 화약과 탄약을 조달토록 하고, 의병진 모집에 주력했다.
전열을 가다듬은 산남의진은 흥해(9월22일), 신녕(9월28일), 의흥(9월29일)에 주둔하는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해 큰 전과를 올렸다.
일본군 보병 14연대는 정환직을 생포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3명의 척후를 앞세워 산남의진을 추격했다.
진영을 2개 대대로 편성한 정환직은 청송과 기계로 이동해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정환직은 흥해분파소를 습격해 대승을 거두고 병기창고에서 무기 400여정을 몰수하는 전과를 올렸다.
산남의진이 관동으로 북상하는 과정에서 정환직은 11월6일 청하면 작전에서 일본군 보병 14연대의 포위망을 뚫지 못하고 피체 되어 영덕, 대구로 이송되면서 귀순할 것을 수차례 권유받았지만 거부했다.
정환직은 1907년 11월16일 영천시 남교(현 조양각)에서 향년 65세로 총살 순국했다.거동사 산남의진 추모제 매년 개최
거동사는 1908년 정환직·용기 장군과 함께 순국한 의병들의 위령제를 지내면서 최세윤 대장을 추대하여 4차 의진을 결집하여 일으킨 곳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 지난해 2월 산남의진 4차 결성지인 이곳 거동사가 국가 보훈처로부터 현충시설로 지정됐다. 이곳은 사찰로는 드물게 정부가 정한 현충시설이다.
산남의진을 일으킨 신라고찰 거동사가 2013년부터 산남의진 순국선열 추모제를 열고 있다.
삼남의진 기념사업회는 정환직.용기 애국지사 순국 107년이 되는 지난해 1차 사업으로 묘소와 주차장 대지를 기념사업회 명의로 매입, 묘역을 새롭게 단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