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광복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경북동부신문사는 광복 70주년을 맞아 중국 항일전선에 불을 지핀 영천 출신 독립운동가 이원대 열사의 항일운동에 대해 알아본다.어릴적 한학을 배우다 보통학교에 입학, 신 학문을 접한 독립운동가 이원대 열사는 졸업후 영천지역의 유일한 중등교육기관인 영천농업보습학교(현 영천중학교)에 입학해 1년 과정을 마쳤다. 열사는 어려서부터 성품이 강직하고, 의협심이 강하여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더구나 도량이 넓고 총명하여 열사의 주위에는 항상 많은 친구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일제의 압제와 수탈에 신음하던 동포들의 모습을 보면서 식민지 상황에 대해 자각하게 된 열사는 항일인사들과 접촉하며 민족독립의 의지를 다졌다.
-독립운동 위해 중국망명
열사는 평소부터 친하게 지내온 이웃 동네의 안병철(安炳喆)의 권유로 1933년 8월 부산에서 우편선 경안환(慶安丸)을 타고 중국으로 망명했다.안병철은 1931년 이육사(李陸史)·조재만(曹再萬)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가, 의열단이 중국 국민당 정부와 제휴해 1932년 10월 남경 교외에 설립한 조선혁명 군사정치간부학교를 제1기로 졸업한 인물이었다.
안병철은 1933년 4월 졸업한 뒤, 제2기 학생 모집을 위해 국내로 잠입한 의열단 공작원이었던 것이다. 그는 평소 의협심이 유난히 강한 의혈 남아였던 열사를 포섭했고, 열사 또한 그의 권유로 독립투쟁에 투신하기로 결심함으로써 중국으로 망명하게 된 것이었다.
1933년 9월 의열단 혁명간부학교에 제2기생으로 입학한 열사는 6개월 과정의 이 학교에서 군사학을 비롯하여 철학·정치학·경제학·사회학, 그리고 각국의 혁명사 등 혁명간부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교육을 받았다.
혁명간부 교육을 앞두고 1934년 2월 김구 요청으로 동기생 14명과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한인특별반에 들어가 1935년 4월 졸업했다.이 특별반은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폭탄투척 의거를 계기로 설립됐다. 졸업 후 민족혁명당에 가입, 특파공작원으로 상해 등에서 일본군 정탐, 일본인 관리암살 등 항일투쟁을 벌였다.
한인특별반의 운영은 김구가 고문 자격으로 총괄했으며, 입교생들에 대한 훈련은 총교도관 이청천(李靑天)을 중심으로 이범석(李範奭)·오광선(吳光鮮)·조경한(趙擎韓)·윤경천(尹敬天)·한헌(韓憲) 등의 교관이 담당했다. 열사는 여기에 입학하여 소정의 교육을 받고 1935년 4월 졸업하였는데, 동기생으로는 김승곤·김일곤·신화균(申化均)·박재혁(朴在爀) 등 62명이었다.
-특파공작원으로 항일투쟁
민족혁명당의 특파공작원으로 중국 경찰과 협조 아래 남경·상해 등지에서 일본군에 대한 정탐활동, 일본인 관리 암살, 그리고 일제 시설 파괴공작 등을 전개하며 항일투쟁을 벌여 갔다.
1937년 12월 열사 등 83명의 민족혁명당 청년당원들은 김원봉에 의해 소집되어 대일항전에서 활용할 특별 공작훈련을 받기 위해 강서성 성자현에 위치한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성자분교(省子分校)의 특별훈련반에 입학했고, 소정의 교육을 마친 열사 등 청년당원들은 김홍일(金弘壹)의 인솔 아래 무한(武漢)으로 이동하여 거기에 있던 민족전선 본부 요원들과 다시 합류했다.
-조선의용군으로 대일항전
1938년 10월 10일 호북성 양자강 연안의 한구(漢口)에서 조선의용대가 창설되었고, 그에 따라 한중 연합작전을 통한 본격적인 대일 무력투쟁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결성 당시 조선의용대는 대본부(隊本部)와 2개 구대(區隊), 그리고 각 구대는 3개 분대로 조직됐다.
이 때 열사는 43명의 민족혁명당원들로 구성된 제1구대에 편성되었는데, 이들 전원은 중국군 제9전구 사령부 예하에 배속됐다.
열사가 속한 제1구대는 1939년 1월 제9전구 예하의 여러 부대에 배속되어 전선에 배치됐다. 이 때 열사는 호남성 막부산맥 방어선의 오동산(梧桐山) 진지에 배치되어 활동했다.막부산맥 방어선은 호남성 곡창지대를 지키는 곳으로 중국군과 일본군이 가장 치열하게 격돌하였던 전선이기도 했다.
여기에 배치된 열사와 제1구대 대원들은 1939년 3월부터 5월까지 상봉(翔鳳)·석산(錫山)·질계항(秩桂巷)·새공교(賽公橋) 공격전 등 여러 차례 전투에 직접 참가했다.
제1차 장사대회전으로 이원대 열사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 제21사 제122연대에 배속된 열사는 막부산맥의 오동산진지에서 주로 대적선무공작, 일군 포로심문 유격전 대적 정보수집공작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조선의용대 병력은 박효삼의 활약과 김원봉의 지원으로 중국 군사위원회의 승인을 얻어 그 해 3월 하순 황하를 건넜는데, 이 때 열사도 제3지대의 일원으로 화북으로 들어 갔다.
-화북성 지역에서 1년간 40여차례 전투 참여
열사는 제1·3지대 대원들과 함께 북진하면서 하남성 북부의 임현(林縣) 일대에서 중국 국민당 정부군 방병훈(龐炳勳) 부대와 합동으로 2개월 동안 적후(敵後)공작을 수행했다. 그리고 뒤 이어 도착한 제2지대에 합류하여 태항산 팔로군지역으로 이동하였고, 여기에서 제1·2·3지대는 1941년 7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개편하고 본부를 산서성 동욕에 두었다.이 때 열사도 화북지대에 편성되어 산서성과 하북성지역을 중심으로 일본군에 대해 항일 선전활동을 전개하며 이후 1년간 40여 차례 직접 전투에도 참전했다.
-대원 모집위해 석가장 지역 활동중 일본군 체포, 순국
1941년 10월 열사는 석가장(석문시)에서 살다가 팔로군 주둔지역으로 탈출해 조선의용군에 합류한 김석계를 대동하고 조선의용군 대원을 모집하기 위해 석가장 지역에 잠입해 활동하던 중 1942년 5월2일 일본군에 체포됐다.
열사는 소위 ‘군사정탐’이라는 죄명으로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북경 헌병대 본부로 이송됐다.북경 일본군 헌병대로 압송된 열사는 김석계와 함께 군사정탐죄로 일본군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43년 6월17일 일본군 헌병대 본부 후원에서 총살됐다. 총살형이 집행되기 전 열사는 눈을 싸매는 것을 거부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조선의 독립을 외치며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정부에서는 열사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정부는 1998년 6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해 열사의 독립운동 정신을 널리 선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