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수난기에 태어나서 일제의 식민 통치에 대항하며 오직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일념으로 중국 대륙에서 줄기차게 항일 독립투쟁을 전개한 애국지사 이진영 열사는 광복 후 광복군 부령으로 총사령부 참모처와 제1지대 본부 구대장을 역임했다. 조국이 광복되자 1946년 5월 광복군 대원들과 함께 귀국, 육군사관학교 특별 7기로 졸업한 후 6·25 전쟁에 중대장으로 참전, 1951년 4월 13일 전사했다. 이진영 열사는 일제의 국권 침탈이 본격화 되던 시기인 1907년 4월 26일 영천시 화북면 오산리에서 익제공 이제현 선생의 17대손인 이집구와 구산 박씨 진환의 딸 유생과 3남중 막내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진영이나 호적상으로는 무선으로 기재되어 있으며 자는 자강, 호는 일우로 중국에서 활동하던 시기에는 우자강, 조병식이라는 다른 이름을 사용했다. 이 열사는 1921년 백학학원에 입학해 이육사, 조재만, 안병철, 이원대, 조상환 등과 교류하면서 신학문을 접했다. 1928년 자천보통학교를 졸업한 이진영은 낮에는 이발 기술을 배우고 밤에는 혼자서 한문과 신학문을 독학하면서 학업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 시기에 마을 삼창리에 있는 이발소에 근무했으며,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접촉하면서 조국에 대한 현실을 직시하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안목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이진영 열사가 항일 투쟁에 뛰어 들도록 결정적인 동기를 부여한 사람은 안병철이었다. 안병철은 1931년 이육사, 조재만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가 남경 근교 김원봉이 설립한 조선혁명 군사정치 학교를 제1기로 졸업한 인물이었다.-독립운동 위해 이원대와 함께 중국 망명1933년 8월경 마을사람으로 김원봉이 설립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제1기를 졸업한 안병철의 권유로 인근마을 이원대와 함께 부산에서 우편선인 경안환을 타고 머나먼 이국만리 중국으로 망명해 항일 독립투쟁에 뛰어 들었다. 1933년 9월 중순경 남경에 도착한 이진영 열사는 의열단 본부가 있는 남경성내 유엽가 56호에서 김원봉을 만나 면담하고, 의열단에 입단했다. 의열단 간부학교 입교당시 이진영 열사는 우자강이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이곳에서 이진영 열사는 독립군 간부로서 갖추어야 할 소양 교육과 군사지식은 물론 강도 높은 실습훈련을 수료하고 졸업을 얼마 남겨 놓지 않은 시기에 김구와 김원봉의 주선으로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한인특별반에 편입하기 위해 동기생14명과 함께 낙양으로 이동했다.-의열단 일원으로 남경 상해 등지에서 비밀첩보활동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한인특별반을 졸업한 이 열사는 김원봉 계열의 동기생들과 함께 그해 4월 중순경 남경으로 이동해 ‘군정부학병대’라 명칭으로 남경성 중화문 밖 통과방에서 의열단의 일원으로 지하공작 활동을 펼쳤으며 대일 항쟁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1935년 7월 민족혁명당이 창당되자 입당해 남경, 상해 등지에서 비밀 첩보 활동을 전개했다. 이진영 열사는 중앙당부와 연락을 담당하는 책임자로 활동하면서 일본군에 대한 정탐활동, 일본인 관리 암살 및 시설파괴 공작활동을 전개하면서 항일투쟁 경력을 쌓았다.-중·일 전쟁 후 본격적인 대일항전 1937년 7월 7일 일본은 북경 교외 노구교 사건을 구실로 중국군에 대한 총격을 개시하면서 마침내 중·일 전쟁을 일으켰다. 이진영 열사는 동료대원 90명과 함께 1937년 12월 1일 강서성 성자현에 위치한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성자분교 특별훈련반 제4중대에 입교했다. 1938년 6개월 과정의 훈련을 마치고 졸업한 이 열사는 김홍일 장군의 인솔하에 조선민족전선 본부가 있는 한구에서 전략적 요충지대인 무한삼진을 수호하는데 필요한 선전공작과 간첩체포, 포로심문, 정탐활동, 시설파괴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조선의용대 창립 요원으로 참여중·일 전쟁이 한창이던 1938년 김원봉은 조선민족전선연맹 산하 무장부대 조직을 추진, 그해 10월 호북성 양자강 연안의 한구에서 조선의용대를 창설했다. 조선의용대가 창설될 당시 이진영 열사는 이집중, 이해명 등과 함께 총무조에 소속 되었고, 후일 조선의용대 중경 판사처 주임으로 임명됐다. 이 열사는 항일투쟁의 동반자 였던 진영청과 결혼했다. 진영청의 부친 진해수는 구두공장을 운영하던 사업가로 조선이 독립활동을 적극 지원했다고 한다. 이 열사는 중국군사위원회와 조선의용대 본부와의 연락업무를 담당하면서 조직확대에 심혈을 기울였고, 중국 각 전구에 파견된 조선의용대 대원들과도 긴밀한 연락체계를 유지했다. 또 조선의용대 여성간부 훈련반의 조직과 운영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이 열사는 조선의용대 중경 판사처 주임으로 근무하면서 조선의용대 조직 확대와 일선에 파견된 대원들과 연락 및 지원 업무는 물론 중국군사위원회와의 긴밀한 협조체제를 유지하면서 활발한 대일 투쟁을 전개했다. 1940년 접어들어 일본군이 계림을 침공하자 조선의용대는 총대를 중국정부가 임시 수도로 정하고 있는 중경으로 옮겼고, 총대부와 지대부의 조직을 확대 개편했다. 이때 총대와 지대와의 연결을 위해 통신처를 계림·의창·낙양에 설치했다.이때 이진영 열사는 통신처 의창 주임으로 임명됐다. 이곳에서 활발한 공작활동과 대적선전사업을 전개했다. 조선의용대 대부분 대원들이 화북으로 이동할 시 이진영은 의창에 그대로 머물러 총대와의 긴밀한 연락체계를 유지하면서 공작활동과 대적 선전사업을 전개했다. -광복군 부령으로 총사령부  참모처와 제1지대 본부 구대장한국광복군의 창설과 조선의용대 화북진출은 중국관내 독립운동 세력이 임정으로 통합을 이루는 하나의 계기로 작용했다. 한국광북군사령부 잠행편제표를 보면 상당히 많은 중국군 장교가 광복군 총사령부에 임명됐다. 전체 인원 45명 가운데 33명이 중국군 간부로 배치됐다. 이때 이진영 열사는 총무처 경리과 중교로 근무했다. 광복군의 재정을 관리하는 부서인 경리과에 한국인으로는 이 열사가 유일하게 배치된 사실은 그가 맡은 역할이 얼마나 중대했는가를 짐작케 하고 있다. 1944년 10월 광복군의 편제와 조직체제를 개편할 시 이 열사는 광복군 총사령부 참모처 제3과 부령으로 근무하면서 임시정부의 사업을 지원하면서 활발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광복후 육군사관학교 졸업, 6.25 참전 전사1945년 중경에서 광복소식을 접한 이 열사는 광복군 소속 동료 대원들과 함께 상해를 거쳐 5월 조국의 품에 안겼다. 중국대륙으로 건너가 목숨을 건 항일투쟁 전선에 뛰어든 지 13년의 귀국 이었다. 조국이 광복되자 1946년 5월 광복군 대원들과 함께 귀국하였으며, 육군사관학교 특별7기로 졸업한 후 6·25 전쟁에 중대장으로 일선부대를 지휘하다 전사했다. 중국대륙에서 항일 독립투쟁을 전개했고, 광복 후 분단된 조국의 현실에서 자유 수호를 위해 싸우다가 한줌의 재로 산화한 이진영 열사의 호국정신은 겨레의 염원이 조국통일의 등불이 되어 이땅을 밝혀 줄 것이다. 이진영 열사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2001년 6월 영천항일운동선양사업회에서 영천시 화북면 오동공원에 추모비를 건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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