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이 발발하면서 전국 각지에서 학생들이 한 손에 펜 대신 총을 들고 전쟁에 참여했다. 1950년 7월 9일 포항중앙초등학교에서 열린 포항지역 학도의용군 환송식에 참가한 호국영웅들은 대구농림중학교에 마련된 임시훈련소에 정식 입소한 것을 시작으로 휴전일인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여 동안 참전했다.
이들 중 대부분은 북한군의 침략으로 위기에 빠진 조국을 구하기 위해 포화 속을 헤치며 용감히 싸우다 꽃다운 나이에 장렬히 산화했다. 국립현충원은 약 5만명의 학생들이 참전해 7천여명이 전사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경북도교육청은 매년 국립영천호국원에서 조국을 위해 산화한 전몰 학도의용군의 거룩한 희생정신을 기리고 있다.
지난 3일 국립영천호국원에서 열린 ‘2015 전몰 학도의용군 추념식’에 경북지역에 생존하고 있는 학도의용군 12명을 초청해 6·25전쟁 당시 학생의 신분으로 참전한 학도의용군들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애국심을 기렸다. 군번도 계급도 없었던 이들이었지만 내 한 몸 불살라 조국을 지키고,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 학도의용군을 소개한다. <편집자주>-학도의용군이 참전한 중요 전투학도의용군이 참전한 중요한 전투로는 포항여중 앞까지 침입한 적과 맞서 싸운 71명의 학도병 중 48명이 전사한 포항전투를 비롯 형산강, 천마산, 비학산, 기계, 안강, 영천신녕, 낙동강, 다부동 전투 등 학도들의 피와 땀이 물들지 않는 강산이 없다.
특히 1950년 9월14일에는 그 유명한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양동작전 일환으로 감행된 장사 상륙작전에는 772명의 학도의용군이 주축이된 작전으로 많은 희생에도 불구하고 상륙에 성공해 적에게 큰 타격을 줌으로써 인천상륙작전에 크게 기여했다.
6·25전쟁 최대 격전지로 불리는 형산강지구 전투에는 500여명의 학도병들이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포항여중 단독 전투 학도의용군 47명 산화 육군3사단 소속 학도의용군 71명이 포항여중에서 단독 전투에 참전해 김준식 외 47명이 산화해 전국에서 가장 많은 학도의용군이 희생된 전투이다.
북한군 12사단이 포항 시내로 진입하자 국군 3사단은 작전상 형산강 남쪽으로 후퇴를 결정했다. 하지만 물러서는 부대가 달려드는 부대를 피해 제대로 정비를 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한데 여유가 없었다.
이때 학도의용군들이 나섰다. 이들 학도의용군은 훈련이라곤 총 한 두 번씩 쏴본 게 전부였다. 학도의용군들은 적의 주력부대를 맞아 포항여중 운동장에서 백병전으로 사력을 다해 싸웠다. 젊은 학도병 71명은 교복을 입은 채로 M1소총과 실탄 250발씩을 들고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이들은 11시간 반 동안 북한군을 막아냈다. 이로 인해 북한군의 주침공 전선이 2시간 동안 지연됐다. 이 덕분에 20여만 명의 피란민 들이 무사히 대피했고 3사단 주력부대도 형산강 너머에서 반격 채비를 갖출 수 있었다.
학도병으로 참전한 최기영 옹은 “어느 누가 부르지도 않았고 어느 교사가 시킨것도 아닌데도 조국의 위난을 그저 보고만 있을 수 없다고 궐기해 적과 싸우다 장렬히 산화한 그들의 정신은 바로 구국정신이었다”고 말했다.
-세계최초 유학생 학도의용군 일본에서 학업 또는 생업에 종사하던 중 자발적으로 참전한 641명의 재일학도의용군은 인천상륙작전, 이원·원산작전, 백마고지 및 금화지구 전투, 장진호 전투 등 6·25전쟁 중 여러 격전에 참전했다.총 135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됐다. 이들은 1967년 중동전쟁 당시 해외 유학중이던 이스라엘 청년들이 조국으로 달려간 것보다 17년이나 빨랐기에 ‘세계 최초의 유학생 학도의용군’으로 불리기도 한다. -학도의용군 기념관, 곳곳에 세우고 기려포항은 학도의용군이 전국에서 가장 많이 희생된 격전지다. 이곳 출신 생존 학도의용군들은 1979년 용흥동 탑산에 터를 잡고 전적물 보존, 추념행사를 갖다가 각계에 건의해 2002년 기념관을 건립했다. 이곳은 학도의용군을 기리는 전국 유일의 기념관이다.
300여명이 참전한 것으로 알려진 포항 동지상업중학교의 전통을 이어받은 포항 동지중·고등학교는 귀한 목숨을 조국에 바친 호국영웅들의 넋을 추모하고 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호국영웅탑`을 건립했다
대구자연과학고(대구농고)도 펜 대신 총을 들고 구국 전선에 뛰어든 애국 청년 학도를 기념하고 후배들에게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의식과 국가안보 정신을 심어주기 위해 교내에 학도의용군 참전 기념비를 건립했다.
대구자연과학고 총동창회가 건립한 기념비는 폭 2.4m, 높이 3.5m 크기로 펜촉 모양 안에 전투하는 학도병 모습을 부조로 새겼고 민족 통일의 염원을 형상화한 커다란 원형 조형물을 펜촉 뒤에 배치했다.
김문목 대한민국학도의용군 포항지회장“치열했던 영천전투 학도의용군 상당수 있었을 듯…”
“영천에도 분명 학도의용군이 있습니다. 신녕전투 등 영천전투가 정말 치열했으니까요.”
6.25전쟁 당시 기계·안강전투에 참여했던 대한민국학도의용군 포항지회 김문목 회장(88)은“영천에는 당시 중학교가 여럿 있었던 걸로 알고 있다”며 “영천에도 학도의용군이 상당수가 있다“고 단언 했다. 그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왜관-신녕-영천-안강-포항 전선에는 학생신분으로 전투에 참가한 이들이 많았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올해 안으로 학도의용군 경북지회 설립과 영천지역 학도의용군 모임 결성을 서두르고 있다”고 밝힌 그는 “이를 계기로 영천지회를 설립하거나 최소한 영천지역 학도의용군의 현황 파악에 나서겠다”고 말했다.
경북지회 설립은 포항 동지중학교(당시 5년제) 학도병 동창생인 이석수 초대 경북 정무부지사를 회장으로 추대해 이미 중앙의 인준을 받아놓은 상태로 사무실만 마련되면 바로 설립될 것이라고 한다. “이미 국군이 안동, 의성까지 밀린 상태라 학교수업이 불가능했던 1950년 7월15일 당시 포항지역 동지,포항,수산 3개 중학교 동창생 3백명과 함께 자진 입대했다”는 김 회장은 “여학생들이 수놓아서 달아준 ‘학병’이라는 마크를 가슴에 달고, 태극기를 몸에 두르고 보무도 당당하게 행진하며 대구 훈련소로 향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동료 학도병들은 임시 훈련소이자 보충대였던 대구농고, 경북농대, 대구동부초등학교로 분산돼 기초훈련을 받았다.
20여일 훈련기간중 전사자가 속출하는 왜관전투 등지로 충원돼가는 동료들을 지켜봤었다는 김 회장은 8월10일 제25연대 3대대 소속 중화기 사수로 안강 445고지로 투입됐다. 445고지는 현재 풍산금속 뒷산 가운데 봉오리.
외동아들인 김 회장은 8월10일 포항역광장에서 전선투입을 기다릴 때 근처에서 한의원을 운영하던 부모님을 입대후 처음 만났다. 부모 몰래 자진 입대했던 김 회장의 이때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아팠다.
“낮에는 고지를 점령했다가 밤에는 후퇴하는 격전을 되풀이하면서 수많은 전사자가 발생했다.김 회장도 부상을 당해 경주 계림학교 야전병원을 거쳐 부산 육군병원으로 후송됐다.“눈앞에서 적탄을 맞고 숨져가는 경주중학교 학도병 동료를 보면서 적개심에 불탔었다”는 김 회장은 “복수의 일발로 적군 한명을 직접 사살했었다”고 밝힌다.
“당시 학도병들은 학교에서 제식훈련을 모두 받은 상태여서 사격훈련만 받으면 곧바로 전장에 투입할 수 있었다” 고 밝힌 그는 “장사상륙작전에 투입됐던 7백72명 전원은 모두 대구와 부산출신 학도의용군이었다”고 강조한다.
한창 전투중일 때 일선 부대로 현장입대했던 학도의용군은 군번도 계급도 없었다. 자진 입대자들은 학도병으로 군번이 있으며 복무기간만큼 전역시 계급이 부여된다. 김 회장의 전역시 계급은 상병이었다.
학도의용군 포항지회장을 맡으면서 열심히 친목을 도모했고, 한사람 두사람 모여 현재 등록회원이 20명이다.
“가장 많은 학도의용군이 희생됐던 포항에는 현재 1백여명이 생존해 있고, 포항이 격전지라 자진입대한 학도의용군도 많았다”는 그는 “생존 학도의용군은 전원 80세 이상으로 대부분 생활형편이 어렵다. 정부지원도 부족하다. 그렇지만 건강유지만 해도 고마울 뿐”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국가를 위한다는 단순한 동기로 학업을 포기하고 자진 입대 했다.
“복교하지 않은 학생은 모두 전사했다. 학도의용군 전사자들에게 미안할 뿐”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