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많은 시민들이 풍수에 대해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에 본지에서는 2016년 1월부터 우리 향토출신 풍수지리 전문가 양삼열(楊三烈)교수의 글을 연재한다. 이 글을 통해 올바로 정립된 풍수학문의 전달과 풍수인식에 대한 잘못된 사고 등 풍수전반에 관한 유익한 정보와 지식을 전달함으로서 애독자 여러분들의 일상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고려시대에는 풍수의 전성기로 고려조 신종원년에는 국가에 산천비보도감이란 관청을 설치하여 전국의 주요사찰들을 관리하였다. 그리고 어떤 목적의 장소가 풍수상 흉지(凶地)라도 여러 가지 비보(裨補:풍수적으로 결함이 있는 곳을 인위적으로 보완하는 것)를 하여 길지(吉地)로 바꾸었으며 풍수지사는 지기(地氣)의 영향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자로서 인정을 받았다. 이러한 능력을 가진 승려들은 국가의 수도이전 등 여러 가지 주요정책에 많은 관여를 하게 된다. 묘청의 서경천도설, 공민왕 때 승 보우의 한양천도설, 신돈의 충주천도설 등은 모두가 풍수에 기준을 두고 주장한 것이며, 무학대사는 풍수지리를 이용하여 조선의 개국을 도왔다. 이렇게 하여 우리나라 풍수의 맥은 도선국사에서 지공선사, 나옹선사 그리고 그의 제자 무학대사로 이어진다. 우리나라는 조선 초까지만 해도 불교사상의 영향으로 음택풍수 보다는 도읍지나 마을 터를 정해 집을 짓거나 사찰건축에 관한 양택풍수가 발전하였는데 조선 초기 이후부터는 유교사상이 강조되면서 조상숭배와 더불어 음택풍수가 성행하기 시작했다. 유가에서는 많은 풍수명사(맹사성, 서거정, 서경덕, 이지함, 남사고)들과 불가에서도 승려(일지, 성지, 송암)들이 많이 나와 유명인들이 많았으며 민간에서도 풍수를 신앙화하여 묘지풍수가 널리 유행하게 되었다. 그런 이후 온 국민들에게 풍수에 대한 관심이 점점 높아지다가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는 유럽과 서양문물이 조금씩 유입되면서 계몽파들에 의해 풍수지리가 차츰 비난을 받기 시작한다. 그러나 개화기에 들어 계몽파들은 풍수지리설을 크게 비난하면서도 본인들은 정작 풍수를 이용하는 이중성을 보였고 일제 강점기에 접어들면서 그들로 부터 풍수지리는 점점 더 멸시당하다가 나중에는 미신으로 까지 취급하게 된다. 이 당시 일제는 매장 및 화장에 대한 규칙을 제정하여 개인 묘지를 불허하고 공동묘지만을 허락하였으며 화장을 적극 장려하였는데 이는 우리의 전통풍속과 관습을 완전 무시한 조치였고 온 국민들의 반감을 사기에 충분했다. 이러한 일제의 탄압으로 풍수사상을 점차 왜곡 시켜 풍수지리가 미신이라고까지 주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들의 식민지 통치에 철저하게 풍수를 이용하였다. 총독부가 중심이 되어 명혈의 지맥을 자르고 정기 맺힌 우리나라의 명산에 쇠말뚝을 박는 등 우리나라 국민들이 패배의식에 젖도록 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식민지 통치 자료를 얻고자 전국적인 행정력을 동원하여 풍수에 관한 자료들을 수집하였다. 그 당시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이 정리하여 책으로 엮은『朝鮮의 風水』가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 최초의 풍수설에 대한 전국적인 조사로 풍수에 관한 여러 가지 내용들을 싣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나라의 풍수지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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