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1905년 강제로 체결된 을사늑약으로 일제가 침탈해 왔을 때 구국의 뜻을 담은 고종황제의 밀지를 품고 분연히 의병을 일으킨 ‘산남의진’을 연극이나 창작 뮤지컬로 만들어 널리 알려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9일 채널경북 별관 3층에서 열린 선원포럼 초청특강에 나선 김정식 담나누미스토리텔링연구원장은 ‘산남의진의 현대적 수용’을 주제로 하는 특강을 통해 영천 자양면 출신의 정환직 대장과 그 아들 정용기 대장에 대한 스토리텔링작업과 문화콘텐츠 개발이 시급하다고 밝혔다. 또 산남의진은 인물보다 사회사 중심으로 보고, 나라사랑 문화유산으로 삼아 보존해야 한다고 방향을 제시했다.
김 원장은 바로 우리 지역에서 일어난 구한말 최대 항일의병의 숭고한 정신을 영천 지역 초중고교 학생들에게 먼저 알려야 한다”며 “산남의진은 구 한말 항일운동의 대표적 의병진영으로 1905년 강제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일제의 침탈에 항거해 영천을 중심으로 경북 남동부 일대에서 떨친 의병진”이라며 중요성을 설명했다.
산남의진은 병오의병의 대표적 의진으로 항일의병항쟁사에 있어 그 규모나 조직면에서 대진영이었다며 산남의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당시적 측면과 현대적 입장으로 해석했다.
고종으로부터 ‘짐망화천지수(朕望 華泉之水)’라는 밀지를 받은 정환직이 아들 정용기와 함께 영천을 중심으로 거병한 의병부대가 바로 산남의진이라고 강조한 김 원장은 일제 침탈에 항거해 영천을 중심으로 포항, 청송, 영덕 등 경북 중부 및 동해안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 진영의 활동상을 자세히 설명했다.
영남 지방을 대표하는 의병부대였던 산남의진은 인근 지역의 신돌석 의병부대와 연합 작전을 수행했고, 1907년 말부터 1908년 초까지 전개된 서울 진공 작전에 참여하기 위해 북상을 준비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며 산남의진 활동과 유형을 소개했다.
특히 당시 일본군의 무기는 자동소총인 반면 의병들의 무기는 화승총이라 우기에는 제대로 격발 되지않아 전투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했다.
게다가 총포 및 화약단속법이 발효되어 무기와 탄약을 구할 수 없어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당시 일제의 군대 해산 만행으로 백산 우재룡 선생과 김성일을 비롯한 해산 군인들이 신무기를 갖고 산남의진에 입진해 전세는 한층 강화됐다고 설명했다.
1908년 산남의진이 순국한 정환직 대장과 그 아들 정용기 부자(父子) 의병대장의 위령제를 지내고 새 대장을 추대한 곳이 거동사인데 3년전 국가보훈처로부터 호국시설로 지정됐다고 밝힌 김 원장은 “2013년 당시 거동사 주지 혜신스님은 위령제를 지내고 산남의진 기념사업회를 창건하는 등 사재를 털어가면서까지 많은 노력을 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