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인의 지역구 대표와 47석의 비례대표를 합해 300석의 국민 대표를 뽑는 제20대 4·13 국회의원 총선거가 전국에서 실시되고 있다. 간접민주정치를 통해, 대의정치 또는 의회정치를 펼치고 있는 것이 근대 민주정치라는 점에서 70년 가까운 우리 헌정사가 어떻게 전개돼 왔는지, 또 우리 고장 영천은 여기에 얼마나 기여해왔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1948년 5·10 제헌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 헌법을 제정하고 이 헌법의 테두리 안에서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고 이를 세계만방에 선포한 그해에 초등학교에 입학한 필자는 2년 후 1950년의 제2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거리에 벽보가 나붙고, “떨어지면 거지가 된다”며 여기저기서 쑤군대던 이야기를 듣곤 했었다. 그만큼 돈이 많이 드는 선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행정구역 단위로 선거구를 책정한 1948년과 50년 선거 다 같이 영천군은 갑구와 을구 등 2개 선거구에서 두 사람의 의원을 선출했는데, 제헌의원 선거에는 각 한 사람씩 후보자가 나와 무투표 당선자를 냄으로써 선거운동이 없었다.
제헌의원 선거는 남북한을 합해 300석 중 UN 감시하의 총선거를 거부한 북한에 100석을 남겨놓고, 선거가 가능한 남한에 200개 선거구를 책정했던 것인데, 4·3사태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제주도의 3개 선거구 가운데 남제주군 선거구를 제외한 북제주군 갑구와 북제주군 을구가 각각 43%와 46.5%의 투표율을 보임으로써 과반수 투표 미달사태로 선거무효가 되어 198명의 국회의원 당선자를 낼 수박에 없었다. 인구 10만명에 국회의원 한 사람씩 뽑는다는 원칙아래 선거가 실시된 이때 영천군 갑구는 경상북도 제17선거구로서 영천읍과 청통면, 신녕면, 화산면, 화북면 등 5개 읍·면이 포함된 가운데,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정도영(鄭島榮) 후보(후에 민주국민당 소속)가 무투표 당선됐다. 영천군 을구는 경북 제18선거구로서 자양면과 임고면, 고경면, 북안면, 대창면, 금호면 등 6개 면이 포함된 가운데 이범교(李範敎) 후보가 역시 무투표 당선됐다. 이 의원은 대한촉성국민회 소속으로 당선된 후 일민구락부로 옮겼다.
제헌국회는 임기가 1948년 5월 31일부터 1950년 5월 30일까지였고, 1950년 5월 30일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영천군 갑구는 무소속 권중돈(權仲敦) 후보가 7,239표, 을구는 무소속 조규설(曺奎卨) 후보가 11,039표로 각각 당선되었다. 이때는 경상북도 제19선거구(영천군 갑)가 영천읍, 청통면, 신녕면, 대창면, 금호면 등 5개 읍·면으로 구성됐고, 제20선거구(영천군을)는 자양면, 임고면, 고경면, 북안면, 화산면, 화북면 등 6개 면으로 구성됐다.
제2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된 지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서 북한공산군의 6·25 남침이 자행됨으로써 우리 민족은 3년 간의 전쟁이라는 국난을 치러야 했고, 전쟁 와중에 조규설 의원은 북한으로 가는 비운을 맞이했다. 1962년 내외문제연구소가 《동아일보》(1962년 4월 18일. 3면)를 통해 공개한 바에 따르면, 전쟁 당시 와병 중이라 북행 이동에도 불편이 있었다고 전한다.
영천 출신 국회의원을 지낸 분 들 중에 권중돈, 김상도(金相道), 조헌수(趙憲秀), 이활(李活), 이원우(李元雨) 의원 등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1954년 5월 20일 실시된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영천군 갑구에서는 자유당 김상도 후보가 16,487표, 을구에서는 무소속 권중돈 후보가 10,009표로 당선되었다. 1958년 5월 2일 실시된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영천군 갑구에서는 자유당의 김상도 후보가 재선되었고, 을구에서는 민주당의 공천을 받은 권중돈 후보가 14,046표를 얻어 3선 의원이 되었다. 4·19 이후 내각책임제 개헌으로 1960년 7월 29일 실시된 제5대 선거에서는 헌정 사상 처음으로 하원(下院)격인 민의원과 상원(上院)격인 참의원 의원 선거가 동시에 실시되었다. 민의원의 경우, 영천군 갑구에서는 민주당 조헌수 후보가 13,736표로 당선되었고, 을구에서는 역시 민주당 권중돈 후보가 주민의 압도적 지지를 받아 4선 의원이 되었다. 참의원 선거는 도(道) 단위 대선거구제로 치렀는데, 경상북도에서는 8명 정원에 38명이 출마했으며, 영천군에서는 신판재(愼判宰) 후보가 민주당 공천으로 나섰지만 낙선하고 말았다. 제2공화국 정부에서 국방부장관을 지낸 권중돈 의원은 5·16 이후 서울 녹번동에서 지낼 때 이따금씩 저녁 모임에서 뵙고는 했고, 조헌수 의원은 영천성당 시절 나의 견진성사 대부님으로, 훗날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협의회가 시상하는 ‘가톨릭대상’을 수상할 때 내가 이 단체의 사무총장으로 있었다. 고려대학교 재단 이사장이었던 이활 의원은 내가 재경영천학우회 회장으로 봉사할 때 신문회관에서 개최한 학우회 총회에 모신 기억이 있고, 이원우 의원은 국제관광공사 사장과 문화공보부장관을 지낸 정치학자 출신으로 나의 방송국 생활에 도움을 준 분이다.
영천의 선거 동향을 보면 초대와 제2대 부통령은 헌법 제53조에 따라 국회에서 선출했지만, 1952년 8월 5일 직선제 제2대 대통령선거와 함께 실시된 제3대 부통령 선거 당시 영천군에서는 총선거인 67,959명 중 62,122명이 투표에 참가해, 이승만 대통령이 지지한 무소속 함태영(咸台永) 후보에게 33,726표를 준 반면, 1956년 5월 15일 제4대 부통령 선거에서는 66,757명이 투표에 참가해 신익희(申翼熙) 대통령 후보가 급서한 민주당의 장면(張勉) 후보에게 44,174표를 던져 자유당이기붕(李起鵬) 후보의 13,502표를 3배도 넘게 지지했다. 우여곡절 끝에 청도군과 함께 한 지역구를 이룬 이번 4.13 총선에서는 단 두 사람의 후보 모두가 영천 출신이며, 과거 영천 단독으로 17만명에서 20만명을 헤아리던 인구가 지금은 두 고장을 합해서 144,206명 인구에 126,104명의 선거인 수를 헤아린다니, 옛 생각이 절로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