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찬 소래기야 배부르다 자랑마라/청산에 앉은 학이 주린들 부를소냐/이몸이 한가할진대 살쪄 무삼하리요.
이 노래는 연산군때 낙향하여 정여창과 더불어 산천을 유람하며 서정과 낭만을 노래한 김일손의 노래이다. 사관이라 하여 딱딱한 것이 아니라 풍류도 즐길줄 아는 멋스러운 남아의 기질을 보여준다.전제군주시대에 임금이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두 가지다. 하나는 하늘이요 하나는 역사이다. 사극을 보면 “전하 하늘을 두려워 하십시오”라는 말이 나온다. 그러나 하늘은 추상적인 존재이고 역사는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존재이다. 또 권력은 유한하지만 역사는 영원하다는 말처럼 권력을 휘두른 어떤 권력자도 역사 앞에 자유로울 수 없다 곧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史官)은 그야말로 정론직필을 생명처럼 여겼던 것이다.
김일손(金馹孫,1464~1498)은 경상도 청도의 운계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 본관은 김해다. 조부는 김극일(金克一)로 길재의 문인이며 아버지 맹(孟)은 김종직의 아버지인 김숙자의 문인이므로 영남학맥의 계보를 이어온 명문가이다. 김일손은 23세에 생원시에 1등 진사시에 2등 하였고 이해 가을에 문과에 2등으로 급제한 수재였다. 그의 호 탁영은 ‘맹자孟子’〈이루상 離婁上〉 편에 나오는 창랑지수청혜 가이탁아영(滄浪之水淸兮 可以濯我纓:창랑의 물의 맑음이여 내 갓끈을 씻을 수 있네)에서 취한 것으로 보여 진다. 그의 현실 대응 자세는 매우 진취적이고 과감했다.
성종의 각별한 신뢰로 사관직을 6년이나 했다. 그는 주로 언관에 재직하면서 문종의 비인 현덕왕후의 소를 복위하라는 과감한 주장과 훈구파의 불의 부패 를 공격하고 사림파의 중앙정계진출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또한 중국사람들은 김일손을 당나라의 대문호 한유와 비교할 만큼 칭송했다.
하지만 연산군4년(1498)에 일어난 무오사화로 그는 35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성종실록》편찬에 실록청을 개설했을 때 이극돈은 당상관으로 총재직을 맡아 사초를 열람하는 과정에서 훈구파의 비행과 이극돈이 전라감사 재임시 세조비였던 정희왕후 국상 중에 근신하고 향을 비롯한 제수품을 바쳐야하는데도 장흥의 기생들과 파티놀이를 한 것을 사관이었던 김일손이 사초에 기록해 놓은 것을 발견하였다. 이극돈이 김일손을 찾아가서 삭제해줄것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자 이극돈은 사초에 김일손이 스승인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조의제문〉을 발견하였는데 이는 진나라 말 숙부인 항우(項羽)가 초나라 회왕을 죽인 것을 연산군의 증조부인 세조가 어린 조카 단종을 죽인 것을 비유한 것으로 이는 선왕을 능멸하는 처사라고 하면서 동지를 찾던 중에 유자광을 만나 연산군을 찾아가서 고했고, 연산군은 사사건건 발목을 잡고 국왕을 비판하는 사림세력들을 제거하기 위해 이 기회를 이용하여 김일손은 능지처참하고, 김종직은 이미 죽은 뒤였기에 부관참시형을 그리고 이때 많은 사림들이 유배가거나 죽임을 당하였다. 청도에 탁영선생의 고귀한 충절이 묻어있는 곳 자계서원(紫溪書院)은 그가 처형될 때 마을의 시냇물이 3일간 붉은 빛이 흘렀다고 해서 유래되었으며 1661년(현종2)에 ‘자계’라고 편액을 하사받아 사액서원으로 지금도 불천의를 받들고 있다. 자계서원을 들어서면 탁영선생이 직접 심었다는 500년 넘은 주인을 닮은 은행나무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뚝히 서있다.
그가 세운 직필은 칼 끝에 목숨을 잃었지만 권력을 뛰어넘는 붓끝이 자계서원 앞에 흐르는 냇물처럼 오늘도 유유히 흘러가고 있다. 위인은 사라져도 역사는 영원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