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많은 시민들이 풍수에 대해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에 본지에서는 2016년 1월부터 우리 향토출신 풍수지리 전문가 양삼열(楊三烈)교수의 글을 연재한다. 이 글을 통해 올바로 정립된 풍수학문의 전달과 풍수인식에 대한 잘못된 사고 등 풍수전반에 관한 유익한 정보와 지식을 전달함으로서 애독자 여러분들의 일상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고려 말 이성계는 왕위찬탈을 위한 혁명과정에서 개경(개성)지역 유민들의 민심을 잃었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개경을 벗어나 새로운 도읍지에서 왕조를 건설하기로 마음먹고 국호개칭도 하기 전에 천도(도읍지 이전)부터 명한다. 풍수가 권중화 등으로부터 도읍지로는 계룡산 자락이 길지라는 말을 듣고 그 곳의 지세를 살펴본 후 궁궐축조공사를 시작하게 된다. 1여 년쯤 공사가 진행되던 중에 경기관찰사 하륜으로부터 계룡산자락은 위치상 또는 풍수적으로도 도읍지는 불가하니 공사를 중단하고 한양으로 옮기자는 상소를 받게 된다. 그 이유를 태조실록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한 나라의 도읍은 마땅히 나라의 중앙에 있어야 하나 계룡산은 지대가 너무 남쪽으로 치우쳐서 동면, 북면, 서면과는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에 통치하기가 불편 할뿐 아니라 계룡산은 풍수적으로도 길지가 되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곳의 산형지세는 건(乾:西北)방에서 산이 오고 손(巽:東南)방으로 물이 빠지니 물이 장생(長生)을 파(破)하여 쇠퇴(衰退)와 패망(敗亡)이 곧 닥치므로 도읍지로서는 적당치 못하다고 반대상소를 올렸다(지금도 풍수에서 많이 사용하고 있는 포태법을 적용). 결국 태조 이성계는 하륜의 손을 들어주고 다시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기로 결정하는데 그때 옮겨진 수도가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것이다. 무학은 한양의 지세를 보고 서편의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고 북쪽에 위치한 북악산을 청룡으로 남쪽의 남산(관악산)을 백호로 삼으라고 하니 정도전은 자고로 제왕은 남면(南向)하여 다스리는 것이지 동향을 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며 난색을 표했다. 이에 무학은 내말을 따르지 않으면 200년 후 큰 환란으로 내 말을 상기하게 될 것이다 라며 경고성 발언을 했다고 한다. 결국 정도전의 주장대로 경북궁은 동향이 아닌 남향으로 지어졌고 무학의 예견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조선은 1392년에 개국하여 정확하게 200년 후인 1592년에 임진왜란이라는 큰 대란이 일어났다. 또한 바위로 이루어진 화산(火山)의 관악산을 정면으로 하게 되었으니 경북궁은 1553년(명종8년)과 1592년(임진왜란)에 잇따라 화마에 불타고 말았다. 어찌 성승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풍수에서는 좌청룡은 장남과 벼슬(官)을, 우백호는 차남과 여자 그리고 부(富)를 관장한다고 해석한다. 무학의 뜻대로 인왕산을 주산(北)으로 삼고 튼튼한 북악산을 좌청룡으로 삼았으면 정면으로 보이는 관악산(火山)의 화기(火氣)도 피하고 조선의 왕실은 장자상속의 왕위가 이뤄져 왕권도 강화되고 큰 환란도 피했을 것이다. 정도전의 주장으로 북악산을 주산(北)으로 하고 산세가 약한 낙산을 좌청룡으로 하였기에 약한 청룡자락의 영향으로 장남(長男)의 발복에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다는 풍수적 해석이 나온다. 역사적 사실을 보더라도 실제 조선의 왕위계승은 장자상속은 많지 않고 장자상속이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단명에 그치고 실제 차남들로 많은 왕권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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