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겨울 내내 조선통신사가 지나간 길 따라 걷기에 빠져 지냈다. 특별히 경상북도 구간인 문경새재에서 안동을 거쳐 경주에 이르는 하행 길과 그리고 귀경길에 해당되는 청도-선산-상주-문경을 몇 차례 왕복하였다. 1377 년부터 440 여 년 동안 일본을 왕래한 조선통신사행단과 함께 호흡하면서 옛길에 배인 흔적을 상상하고 향유하는 즐거움을 누리곤 하였다.
물론 사행문화 유산을 새롭게 조명하고 경상북도의 관광콘텐츠로 재구성하려는 목적이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어느 햇살 고운 날 나는 문소루에 올랐다. 의성읍의 초입에 우뚝 선 문소루는 사행단이 쉬면서 피로를 푼 곳이다. 고려 중기에 창건한 이래 오랜 세월 동안 자리를 지켜온 문소루는 모진 화재와 6.25 전쟁 등을 겪으면서 본래의 건축물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물론 옛 사행단이 머물던 누각도 오늘날 전해지지 않는다.
그나마 1983년에 복원한 것이 현재에 이르는데 정면 3칸, 측면 3칸 2층 팔작지붕의 정방형인 문소루를 원형 그대로 살려낸 것이다. 기단은 낮지만 의성읍내를 감싼 구봉산 자락의 높은 언덕에 세워진 문소루는 그 위용이 보기에도 활달하고 훤칠하다.
누마루에 앉으니 임란 직전 일본사신으로 떠나다 문소루에 남긴 학봉 김성일의 편액시가 눈에 띄었다.
‘문소 객사에서 이틀 묵으니 한바탕 꿈인 듯 하고 높은 수레 고향 땅을 지나니 쇠뇌를 등에 지는 은혜와 영광 한이 없으라...’
충심이 가득한 학봉의 시적 여운에 잠겨있다 보니 언뜻 1711년 사행단의 부사 임수간이 썼던 <동사일기>가 떠오른다. 그가 남긴 쌍검무 관람기가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청송에서 온 기생 두 사람의 칼춤이 볼만했는데 쌍검을 던졌다가 한 손으로 다시 받는 그 솜씨가 참으로 뛰어난 기예였다.’
당시 의성 지역의 수령들이 문소루에서 통신사를 송별하는 연회를 베풀 때 특별한 감상꺼리로 내 놓은 것이 쌍검무다. 검무에 대한 기록은 1713년, 청나라 사신으로 다녀온 김창업의 <연행일기>에도 ‘칼춤은 내가 어릴 때 보지 못했는데 그 사이 수십 년 동안 성행하여 이제는 8도에 두루 퍼져 기생이 있는 고을이면 잔치를 할 때 가장 먼저 검무를 춘다’ 고 적혀 있다.
나는 몇 해 전, 간송미술관에서 신윤복이 그린 ‘쌍검대무’를 꼼꼼 살펴본 적이 있다. 틀어 올린 머리 위에 전립을 쓰고 각각 청홍색의 전복을 입은 두 사람의 여자 무희가 양 손에 칼을 들고 날렵하게 춤을 추는 그림이다. 주빈인 듯한 사나이가 긴 곤방대를 들고 가장자리를 청색으로 둘려낸 화문석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고 그 주변의 몇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춤사위를 지켜보고 있다.
사뿐히 들어 올린 버선발을 감출 듯이 내려놓는가 하면 뛰어오르면서 칼로 찌를 듯이 관객 한 사람을 위협을 하고는 다시 옷자락이 휘날리도록 휘돌아 내려놓는 무희들의 춤사위는 구경꾼들을 긴장감에 휩싸이게 하여 눈을 떼지 못하게 했나보다. 마치 출렁거리는 물살을 타는 듯 칼을 내 밀고 끌어당기는 무희의 몸짓이 유연하다 했으니 그 옛날 사신들의 장도를 환송하기 위해 베풀어진 문소루의 쌍칼춤은 분명 특별한 볼거리였으리라.
우리 주변에 누각이나 정자들이 수 없이 많다. 비록 선비들의 독점적인 공간이긴 하지만 소통과 강학의 공간이던 누정은 현대적으로 수용할 다양한 문화콘텐츠가 담겨 있는 곳이다. 문소루도 예외가 아니다.
정자의 외양이나 건축구조 그리고 주변의 풍광은 별 차이가 없지만 시대 상황에 맞게 향유한 목록에 관심을 기울여 보노라면 그 하나하나가 다 뚜렷한 존재의 이유를 말해 주고 있다. 우리나라 곳곳 풍광이 뛰어난 곳인데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정자가 많다. 하나같이 건축물의 이력에 불과한 단순 정보를 알려주는 입간판만 달랑 있을 뿐 그 외에 달리 여행객이나 지역민들이 찾아와서 즐기고 체험할 문화콘텐츠가 없는 까닭인 듯하다.
문화재가 사람들의 발길을 이끌어 오는 관광자산이 되기까지는 그만의 고유한 엔터테인먼트 옷이 입혀져야 하는 법이다. 옛 목록을 그대로 재현하든 아니면 새로운 시각으로 재구성하든....이 시대에 문소루에서 사행단이 즐기던 쌍검무를 재현해 본다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신라 이래 상무정신에 근거하여 발전한 검무였고 조선시대에 이르러 점차 연희적 지방민속 무용으로 변모하여 오다 18세기 무렵 널리 유행했던 것으로 짐작되는 그 검무를 이렇게 신록이 짙푸르러 지는 봄날 멋들어지게 공연해 보는 것도 풍치가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