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쩍소쩍 / 달 뜨는 저녁 산속에서 무엇을 호소하나 뻐꾹뻐꾹/ 파촉산을 바라보고 날아서 건너고 싶어라 뭇 새들은 다 보아도 편안히 잠자는데 / 너만 홀로 꽃을 향해 피를 토해 우는 구나, 형세도 외로웁고, 모양도 쇠약하니 / 존귀한 체 아니하니 누가 너를 돌아 보리, 아! 인간의 원한이 어찌 나뿐이랴 의사 충신들이 강개하여 솟는 불평 / 손꼽아 세어 본들 다 세이기 어려워라.단종의 `자규사`를 보고 동쪽을 향하여 네 번 절하고 조상치는 위와 같이 화답하는 자규시를 썼다. 조상치(曺尙治)의 자는 자경(子景) 호는 단고(丹皐) 또는 정재(靜齋), 시호는 충정(忠貞), 본관은 창녕으로 병마사 신충(信忠)의 아들로 야은 길재에게 배우고, 1419년(세종1) 증광문과에 장원급제, 집현전에 들고, 세종 ? 문종 ? 단종 3조에 걸쳐 벼슬이 부재학(副提學)에까지 이르렀다. 증광문과 1등으로 뽑혀 급제자 명단을 부르던 날, 상왕 태종이 말하기를??네가 왕씨(고려)의 신하 조신충의 아들이냐??하고 이어 곧바로 정언에 임명하도록 명하고 비단도포와 총마로서 휴가를 주어 귀근케 하였다. 아버지 신충은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고려의 신하로 충절을 지켰던 인물이다. 세조가 단종을 핍박하여 양위를 받게 되자 정재공은 병을 빌미로 "나아갈 줄만 알고 물러날 줄 모르는 것은 바로 군자가 경계할 일입니다" 라 상소하였다. 세조는 그를 예조 참판에 승진시켜 벼슬을 내렸지만 그가 다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입궐하여 인사하지 않고, 동대문 밖으로 빠져나와 한강에 다다르니, 길거리에서 보는 이나 높은 벼슬아치나 유식한 사람들이 모두들 탄식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당시의 일을 박팽년의 편지에 “떠나시는 뒷모습을 바라 볼 때 높고 높아 따라가기 어렵다.”고 하였으며, 성삼문 또한 “영천의 맑은 바람이 문득 동방의 기산영수(箕山潁水)를 지었으니, 우리들은 조선생의 죄인이라.”하였다. 이와 같이 정재 선생의 행신은 이미 다른 이들의 사표(師表)가 되었다. 정재선생은 영천에 이르러 방안에 굳게 문을 닫고 들어앉아 담장 밖을 나가지 않고 종신토록 한 번도 서쪽을 향해 앉지 않았다고 한다.  단종이 승하하게 되자, 손님도 모두 사절하고 일체 세상일에 대해 묻는 일이 없었으며, 비록 집안 식구라도 그 얼굴을 보기가 드물었다고 한다. 밤마다 자지 않고 홀로 앉아 슬피 울더니, 자연석을 얻어 손수 써서 새기기를 ‘노산조 부제학 포인 조상치 지묘’ 라 하였는데, 노산조라 쓴 것은 오늘의 신하가 아니란 것을 밝힌 것이요, 품계를 쓰지 않은 것은 임금을 구제하지 못한 죄를 나타낸 것이요, 부제학이라 쓴 것은 그 사실을 아주 없이 하지 않으려 한 것이요, 포인이라 쓴 것은 망명하여 도망친 사람임을 말한 것이다. 선생이 죽기전에 이미 평생에 저술한 문장을 모두 불태우고 한 편도 남기지 않았다. 그리고 모든 자제를 불러 유언하기를 “일후에 혹 유고(遺稿)를 얻는 일이 있더라도 문집을 간행하지 말고 비석을 세우지도 말라”하였다. 선생은 이미 그 임금을 구제하지 못한 일을 스스로 깊은 죄책감을 느낀데 따른 것이다. 이후 300년이 지난 정조 15년(1791) 단종의 장릉에 배향되었고, 영천 금호에 창주서원에 제향하고 있다. 참 선비의 실천정신은 순절을 하였든 은둔을 하였든지 간에 명분과 절의, 국가를 위한 대의가 아니면 결코 따르려 하지 않았던 선생의 올곧은 정신과 처신은 만고에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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