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른 국화 만발한데 늙은 첨지가 와서 보니/물은 푸르고 모래 맑은 자그마한 토대로다. 예전에 배운 글 따스하게 하고 새로 익혀 저버리지 말자/선사에 남은 훈계 후생들에게 열게 할지어다. 이 시는 김응생(金應生1496-1555)선생이 영천에 첫 교육의 물꼬를 튼 자양서당에서 제자들에게 선사의 유업을 받들어 학문에 전력하고 중단하지 말라는 교훈을 담은 시다.
김응생 선생의 자는 덕수(德秀), 호는 명산(明山), 본관은 경주로 연산군 2년(1496)에 영천시 자양면 노항리에서 태어났다. 김을초(金乙軺)를 파조(派祖)로 하는 규정공파(糾正公派)로 김을초의 장남 영천 입향조 호연당(浩然堂) 김자양(金自養)이 고조부가 된다. 부인은 숙부인(淑夫人) 영일 정씨로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고 아들은 참봉(參奉) 김척(金滌)과 도사(都事) 김한(金澣), 왕으로부터 사호를 받은 해동소무(海東蘇武) 김완(金浣)이며, 사위는 오천인(烏川人) 정용(鄭容)과 부림인(缶林人) 홍거원(洪巨源)이다. 아들 완(浣)이 임진왜란 때 원종공신 선무후공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호조참의(戶曹參議)의 증직을 받았다.
그는 어릴 때부터 품성이 단정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열세 살 어린나이에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자양면에 장사를 지낸 후 무덤 아래 초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였는데, 묘 앞에 앉아 절을 한 자리에 눈물이 떨어져 풀이 마르고 흙이 파였다 하니 시묘하는 정성과 애통함이 어른과 같았다 한다. 효성에 하늘이 감동한 것인지 밤이 되면 큰 호랑이가 나와서 초막 옆에 엎드려 지키고 있다가 날이 밝으면 돌아갔다고 하니, 필자의 막내가 15세인데 감히 생각해 볼 수 없는 용감한 효심에 가히 놀라울 뿐이다. 500년이 넘은 요즘도 선생이 시묘했던 골짜기(자양면 용산리 노적봉 밑)는 시묘골로 불리고 있다.
김응생은 퇴계 이황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성리학을 연구하고 도학에 전력하면서 효는 백행의 근본임<효백행지본(孝百行之本)>을 깨닫고 실행해 퇴계 선생의 총애를 받았다한다. 학문을 숭상하며 동네 가운데 서있는 은행나무 밑에 단을 모으고 공부하는 사람들로 상읍례(相揖禮)를 행하게 하고 예절을 익혀서 ‘효’의 사상을 고취시켜 향리의 후진교육에 전력하여 사재를 털어 교육사업에 투자하였다. 이로 인해 경술년 1550년(명종5 자양서당기 기준)에 같은 마을에 정윤량, 이의등과 같이 자양면 노항동에 자양서당을 창건했다.
노항리란 동명은 공자를 추향하여 공자의 고향 노항을 본따 지은 것이다. 선비가 학문하여 처음 벼슬에 나아가는 기초가 되고 또한 국가가 사문(斯文)을 높이는 날에 보탬이 되게 하기 위한 목적을 삼았는데 “삼대(三代)의 학교는 모두 인륜을 밝히기 위해 만들어졌다. 도가 하루라도 행해지지 않으면 인류가 하루 만에 다 없어진다” 하여 교육에 지표를 세웠다. 퇴계 선생이 친히 자양서당 편액을 써주어 지금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 후 “우리 향중은 포은 선생이 출생한 곳이라 실지로 해동 백록동(海東 白鹿洞)이라” 하여 임고서원의 창건에 앞장섰는데 정몽주(鄭夢周) 선생의 도학, 충절, 효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퇴계 선생에게 그 규모와 절차를 문의하여 향사지내고 공동으로 재물을 모아 집을 건축하고 태학의 제도와 같이 학규를 정하여, 많은 서적을 사서 서원 장서실에 두고 학자들로 열람, 탐구하게 하여 선대의 유풍을 일으켜 당시는 물론 후세에 이르기까지 충효례의 유교사상을 밝혀나갔다. 일평생 올곧은 선비로 교육사업과 후진양성에만 진력하여 살다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지만 지금도 임고서원 앞에 도도히 서있는 은행나무가 그 옛날 자양서당에서 가져와 심어서 그런지 그 큰 기상과 웅장함 고고한 선비의 품성이 그대로 엿보인다.
명산 김응생 선생. 그는 갔으나 500년이 지난 지금도 영천의 교육의 마중물로 자양서양의 정신속에 힘차게 펌프질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