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남명 조식(曺植)이 소요당 박하담(朴河淡 : 1479~1560)을 찾아와 나라에서 세 번이나 불렀는데 왜 출사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분수가 벼슬할 그릇이 못 되고, 늙은 어버이를 두고 멀리 떠날 수 없기 때문이다’고 겸양에 말을 했다.
선비는 모름지기 이윤[伊尹]의 뜻한 바를 뜻하고 안연[顔淵]의 배운바를 배워 나아가 벼슬을 한다면 천하에 큰 공을 이룩하고 숨어 학문을 하면 지키는 절조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일찍이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한 명분 있는 선비였다. 소요정에서 명류(名流)들인 남명 조 식,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 경재(警齋) 곽 순(郭珣), 송당(松堂) 박 영(朴英), 청송(聽訟) 성수침(成守琛),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 송계(松溪) 신계성(申季誠) 등 조선을 쥐락 펴락하는 제현들과 도의지교를 맺고 삼족대에서 강론을 펼쳤다.
소요당의 높은 학문과 올바른 삶을 알게 된 관찰사가 ‘백행의 근본인 효를 다하고 육경(六經)을 깊이 연구한 선비이며 숨은 인재’라고 천거하였지만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연구와 후학을 가르치는 일에 생을 바쳤다.
박하담의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응천(應千),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호는 소요당(逍遙堂)으로 소요당이라는 호는 청도운문산 기슭 아래 입암(立巖) 또는 눌연(訥淵) 위에 소요정(逍遙亭) 정자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충순공(忠順公) 박승원(朴承元)과 어머니 진양 하씨(晋陽河氏) 사이에서 지금의 청도군 이서면 수야리에서 태어났다. “냇물이 잇달아 흐르는 것”을 보고는「수야(水也) 마을」이라고 동명(洞名)을 지어 불렀다. 어릴 때부터 그는 읽기를 좋아하고 말과 행동이 법도에 어긋남이 없어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특히 동창(東窓) 김준손(金駿孫 1454~1507)이 그를 보고 공자(孔子)가 가장 아꼈던 제자 자공(子貢)에 비유할 정도로 학문에 큰 업적을 이루었다. 산동지역에서 절친 삼족당 김대유와 백성을 위해 사창을 설치하여 환곡법을 실시케 함에 애민사상을 엿 볼 수 있다.
동향 선배인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오졸재(迂拙齋) 박한주(朴漢柱) 등이 무오사화(戊午士禍)로 기묘사화 때 훈구파(勳舊派)에 의해 많은 신진 사류(新進士類) 선비들이 희생을 당하자, 분개하여 지은 모든 문고 등을 불태워 없앴지만, 임종하기 하루 전에 자손들을 위해 지은 10가지 사항의「가훈십조(家訓十條)」와 소요당일고 5권을 남겼다.
그가 성장 이서면 수야리에는 소요당이 직접 심었다는 큰 은행나무가 있다. 500여 년의 세월 속에 우뚝히 성장한 나무의 무수한 가지처럼 후손들은 번창했다. 그의 나라사랑 정신과 영남학맥의 주류를 이루는 유교사상은 면면히 후손들에게 내려와 손자와 증손자 대인 임진왜란 때 14의사(義士)를 배출하였는데. 부자, 형제, 숙질, 종형제가 의병을 일으켜 왜적에게 큰 타격을 주어 그 중에서 열두분이 선무원종공신 1.2.3등에 책봉되고, 1분은 병자호란 때 진무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었는데 이는 선비가 국가위기상태에서 의를 구현한 실천정신을 보여주었다 하겠다.
82세(1560년)로 세상을 떠났으며, 학덕을 겸비하였기에 정헌대부 이조판서(正憲大夫吏曹判書)로 증직되었으며, 사림(士林)이 주선하여 동창에 운수정을 건립하고 향현사(鄕賢祠)에 배향 하였고, 금천면 신지리로 옮겨 선암서원(仙巖書院)에 광해군(光海君) 10년에 다시 우연서원을 지어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 경재(警齋) 곽 순(郭珣)와 함께 배향(背向)되고 있다. 그가 남긴 가훈10조중 아홉번째 독서불가폐에 보면 “사람이 중단해서는 안되는 게 시 와 글의 공부이며 글을 배우지 않으면 담을 쳐다보는 것과 같고, 아는 것이 없어 짐승과 다름없으며 가히 사람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했다. 며칠 후면 스승에 날이다. ‘공부를 통해 사람이 사람답게 된다’ 란 소유당선생의 말씀이 사뭇 스승에 대한 감사에 마음을 가져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