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시에서 임고면소재지로 접어드는 길목에 매호운천길을 지나 임고서원 직전 좌측 산아래 단아한 모습에 고려시대의 충과 효를 고루 겸비한 학자 이감(李敢1362~1426) 선생을 추모하는 임강정사(臨.岡精舍)가 보인다. 자는 의민(義民), 호는 문한당(文閒堂), 첨정자(添丁子)이며, 영천 이씨(永川 李氏) 상장군파(上將軍派)의 후손으로 상장군파의 8세손이다. 부친은 좌우위보승랑장(左右衛保勝郞長) 이영기(李英奇)로 부인은 정부인(貞夫人) 이씨(李氏)는 전의판서(典議判書) 이을현(李乙賢)의 딸과 정부인(貞夫人) 동래 정씨(東萊 鄭氏) 참봉(參奉) 정인보(鄭仁保)의 딸이다. 슬하에 3남 4녀를 두니 아들은 현감(縣監) 이거졸(李居拙)과 현감(縣監) 이거로(李居魯), 이거경(李居敬)이며, 사위는 판관(判官) 정개보(鄭介甫), 생원(生員) 양계남(楊季男), 만호(萬戶) 권자성(權自誠), 사정(司正) 조효원(曺孝元)이다. 이감 선생은 포은 정몽주의 고향 인근 임고면 양항리에서 태어나 선생의 행함을 듣고 또 보며 자랐다. 1380년에 진사, 생원 양과에 2등으로 합격하고, 우왕 11년 (138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간관(諫官)이 되어 임금께 직언(直言)으로써 그 명성을 떨쳤다. 1390년(공양왕2) 9월에 사헌규정(司憲糾正)으로서 무절제한 시상(施賞)을 극론(極論)하시다가, 왕의 비위에 거슬려 지방의 감무(監務)로 좌천 되었으나, 이에 불만을 품은 동료간관(諫官)들이 일제히 병을 핑계로 집무를 거부하여 선생을 구명하여 사헌지평(司憲持平 )에 임명되었다. 또한 포은 정몽주 선생이 이방원 일당에 의해 살해될 때, 정도전 등 신진세력의 미움을 받아 온건 개혁파 였던 간관, 김진양과 이확, 이내, 이감, 권홍, 유근 등이 조준, 정도전, 남은, 윤소종, 남재, 조박 등과 논죄, 탄핵되어 직첩을 회수하고 장(杖) 70대를 맞고 장사현에 귀양을 가므로 고려 수절신(守節臣) 56 현(賢)중 한분이 되셨다. 조선이 개국 이성계(李成桂)가 즉위하자, 다시 정몽주와 동향이며 뜻을 같이 했다는 이유로 장형을 받고 북청(北靑) 으로 유배되었다. 10월에 사면되어 영천 돌목 고향으로 돌아와 8년 동안 학문을 닦고 후진 양성에 매진하였다. 정종 2년에 나라의 부름을 받아 병조정랑, 지영주군사, 사헌부장령, 상주목사, 밀양도호부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행의(行誼)로 천거되어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종4품)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등을 지냈고, 내·외직을 두루 거쳐 통정대부,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다. 언제나 부모를 극진히 봉양했던 그는 재직중 양친 모두가 90세를 넘겨 돌아가시자 사직하고 내려와 ‘주자가례’에 따라 장례를 극진히 치렀다. “내가 장례를 극진히 하는 것은 포은 선생에게서 얻은 것이라”하며 피눈물로 묘소를 돌보며 각각 3년을 여묘사리를 정성으로 하니 호랑이도 감동하여 곁을 따르며 보호해 주었다고 한다. 1409년 조정에서는 선생의 효행과 덕행을 기려 나라에서 정려하여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에 정려각을 세워 기리고 있다. 이감 선생은 1426년 6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나 문한당 앞에는 수령이 400년이 넘는 우람한 은행나무가 긴 세월 그의 효성을 기리며 맞은편 세워진 정려각의 ‘문한당이선생지려(文閑堂李先生之閭)’ 라는 글귀의 현판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다. 노랑 고운 빛깔에 취해 은행나무 주위를 걷노라면 수백년을 넘어서 문한당 마당을 굽이도는 시샛물 소리와 같이 이감 선생의 고풍스런 학덕과 효심을 어쩌면 잠시 만날 수 있으려나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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