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가을 모처럼 고향에 갔다. 그곳에는 형제와 사촌들은 거의 대처로 나가고 오직 팔순이 넘은 몇몇 친족만 옛집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오랜만에 잊어버렸던 냄새를 맡았다. 메주 뜨는 냄새였다. 벽에서 풍기는 흙냄새와 메주 뜨는 냄새가 처음에는 매우 역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조금 있으니 그 냄새가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마치 내가 어린 날 어머니의 품에 안긴 것 같았다. 어머니 품에서는 그런 냄새가 가끔 났으니 말이다. 이웃 일본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다다미 냄새에 익숙해져 있다. 21세기 첨단 정보화 사회인 일본이지만 집안에서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예스런 다다미 위에서 생활한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이 자라 성인이 되어 외국에 있을 때, 그들이 매우 그리워하는 것은 다다미 냄새라고 한다. 귀국하면 제일 먼저 다다미에 코를 대고 미친 듯이 냄새를 맡는다고 한다. 이것은 그들의 원초적인 정서이다.
다다미 냄새는 일본의 냄새이다. 버터가 미국을 상징하고 우롱차가 중국을 상징한다면 다다미 냄새는 일본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냄새는 무엇일까? 된장냄새, 김치 냄새, 아니면 지금은 별로 맡을 수 없는 토담집 흙냄새일까. 아쉽게도 우리는 대표성을 띤 상징적인 냄새를 갖기는커녕, 서양냄새에 길들여 고유한 우리 냄새를 잊고 있다.
시내 중심가의 식당 앞을 지나가 보라. 버터와 치즈 등 온통 서양의 음식 냄새가 길에까지 풍겨 나오고 있지 않는가. 훗날 우리의 냄새가 기억 속에만 존재할까 걱정스럽다. 냄새뿐만이 아니다 우리의 빛깔도 사라지고 있다. 여름날 피는 박꽃의 하양도, 채송화의 빨강, 노랑을 닮은 빛깔도 멀어져 간다. 과꽃의 연한 자주도 잊히고 있다. 대신 서양에서 들여온 장미나 후리지아, 튤립 등 원색의 강렬한 빛깔들이 일상생활 속에 깊숙이 파고든지 오래다. 진달래와 개나리의 맑고 고운 분홍과 노랑은 언뜻 보면 서양의 꽃빛깔과 비슷하지만 자세히 보면 다르다. 우리의 빛깔은 맑고 투명하며 애잔하다.
우리는 그런 토속적인 빛깔을 사랑했다.
도시에서 생활하다보면 시골의 모습이 못 견디게 보고 싶을 때가 있다. 여름 날 초가지붕 위에서 환한 빛으로 달을 맞이하는 박꽃과, 흙담 위에 수줍은 듯 다소곳이 반기는 빨강, 노랑의 채송화를 보고 우리는 얼마나 행복함을 느꼈던가.
그것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키운 한민족 고유의 정서였기 때문이다. 또 창호지의 빛깔은 어떤가. 나무의 가장 순수한 넋을 걸러서 만든 창호지의 빛깔은 광물질의 차가운 유리창과는 다른 정감이 있다.
나는 창호지를 투과한 은은한 빛이 문갑 위에 놓인 백자 항아리를 감싼 그 아름다움을 잃고 싶지 않다. 이제 고유한 냄새도, 빛깔도 바뀌고 생활습관도 우리 것에서 점차 멀어지고 있다. 이미 상당수가 빛바랜 사진 속에서나 만날 수 있는 풍경이 되고 말았다. 젊은이들의 냄새 감각은 치즈나, 케첩, 햄버그, 콜라 등에 더 익숙해져 있고, 된장의 구수함이나 김치의 매콤하고 싱그러운 냄새에는 많이 무디어져 있다.
빛깔도 원색의 강렬함을 선호한다.
나라 고유의 냄새와 빛깔은 민족을 끈끈하게 이어주는 구실을 한다. 아일랜드의 흑맥주는 그 맥주를 마시는 사람이 모두 친구라 하지 않던가. 흑맥주는 아일랜드의 냄새와 빛깔인 것이다.
우리에게도 아일랜드 흑맥주의 빛깔이나, 다다미 냄새를 맡으며 자기의 정체성을 새삼 깨닫게 하는 냄새는 정말 없을까. 분명히 그런 냄새나 빛깔이 있을 것이다. 지구촌 시대에 문화적 미아로 남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 것에 대한 마음을 다잡아야겠다.
*약력/ 하청호경북영천 신녕출생*‘현대시학’(76) 시 추천 및 ‘동아일보’(73) 신춘문예 동시 당선*시집 ‘다비(茶毘)노을’외, 동시집 ‘잡초 뽑기’ 외 세종아동문학상(76), 대한민국문학상(89), 방정환문학상(91),윤석중문학상(06), 대구광역시문화상/문학(05) 등 수상*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