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철에 비가 아주 적게 오거나 갠 날이 계속되는 기상 현상을 ‘마른장마’라고 한다던데, 올해 장마가 그런 꼴이 아닌가 싶다. 어쨌거나 장마가 진행 중인 가운데 우리는 유월을 마감하고 칠월을 맞게 된다. 며칠 전에 6·25 전쟁 66주년을 지냈고, 7월에는 정전협정 63주년을 맞이한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953년에 나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는데, 전쟁과 관련해서 세 가지 기억이 뚜렷하다. 아니, 그때는 학년 초가 4월이었으니, 아직 추운 날씨였던 3월은 5학년 말이었다. 북한 공산군의 남침을 뒤에서 조종한 소련공산당 서기장 이시오프 스탈린이 뇌일혈로 3월 4일에 급사한 사실을 선생님이 판서를 해가면서 전해주신 일이 크게 기억에 남아 있고, ‘휴전회담 결사반대!’라는 플래카드를 뒤따르면서 거의 매일이다시피 시위에 동원됐던 기억 또한 또렷하다.
6·25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유엔군측과 공산군측이 1951년 7월 10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지속한 군사회담이 휴전회담이다. 6·25 도발 후 1년간의 전쟁을 통해 공산군측은 그들의 힘으로 전 한반도를 석권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고, 유엔군측으로서도 힘에 의한 응징에는 한계가 있다는 상황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과 소련은 각각 한반도에서 얻게 될 전략적 이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상대의 의도를 확인했고, 이로써 이 지역에서 냉전구조의 균형 현실을 서로가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포로처리문제를 둘러싸고 회담은 난항을 겪게 됐다. 유엔군측은 포로 개개인의 자유의사에 따라 한국·북한·중국 또는 대만을 선택하게 하는 이른바 ‘자유송환방식’을 주장한 데 대해, 공산군측은 모든 중공군과 북한군 포로는 무조건 각기 고국에 송환되어야 한다는 이른바 ‘강제송환방식’을 고집했다. 그래서 1952년 2월 27일부터 약 2개월 동안 협상이 중단되었고, 10월 8일에는 무기휴회로 들어갔다. 그런 가운데 제2차 세계대전의 절정 노르망디 작전의 영웅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이 1952년 11월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아이크’라는 닉네임을 활용한 ‘아이 라이크 아이크’(I Like Ike)라는 구호와 ‘한국전쟁 종식’이라는 공약을 내세워 앞도적인 표차로 당선돼 이듬해 53년 1월 제34대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전쟁과 회담은 새로운 국면을 향해 치달아갔다. 게다가 3월에 스탈린이 사망한 것이고 보면 더욱 더 그런 모양새를 보여 가고 있었다. 이때 우리 정부의 입장은 어떠했던가? 1953년 3월 하순, 휴전회담이 재개되면서 휴전 반대 운동은 열기를 더해갔고, 4월 5일 이승만 대통령은 “국토 통일이 이룩되지 못하는 휴전보다는 차라리 한·만 국경선으로의 진격을 단행해야 할 것”이라고 미국과 유엔군 사령부를 겨냥해 결의를 표명했다. 이에 따라 4월 6일에는 서울에서, 4월 10일에는 부산에서 수만 명의 학생들이 집결해 “통일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라고 외쳤고, 마침내 4월 25일에는 인천에서도 휴전을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영천에서도 시위는 계속됐고, 학생들이 참여했다.
반공포로 석방유월의 기억들 가운데 세 번째이면서 가장 큰 사건은 반공포로 석방이다. 영천역 플랫폼까지 우리 학생들이 나가서 어딘가로 기차를 타고 가는 포로들을 박수로 환송해주었던 것이다.유엔군 측이 한국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협상을 지속시켜 나가자, 이승만 대통령은 6월 6일 휴전에 대한 대안을 유엔군과 공산군 측이 동시에 철군하고, 이 전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러한 제안에 대해 미국은 즉각 반응을 보여주지 않았다. 이 대통령은 휴전협정이 곧 성립되리라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으며 모종의 압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당시 국내에는 약 3만 5천명에 이르는 반공포로들이 수용돼 있었다. 각 수용소장은 소수의 행정참모와 기술참모를 거느린 반면, 경비 병력의 대다수는 한국군이었다.
6월 18일부터 이틀간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포로의 석방을 단행했다. 부산·대구·영천·마산·광주·논산·부평 등 각지에서 국군헌병대는 18일 새벽 0시를 기해 수용소의 전원을 끊고 철조망을 뚫은 다음 반공포로들의 구출작전을 실행한 것. 그리고 서울중앙방송국은 헌병총사령관 원용덕 중장의 포고문을 특별방송했다. 반공포로들은 한국군 경비병의 묵인과 협조 하에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했다. 수용소 인근 주민들도 반공포로들을 도와주면서 3만5,451명의 반공포로들 가운데 2만6,424명이 탈출에 성공하고, 8000명 가량은 실패하고 말았다. 공산군 측은 대단한 분노를 표시하면서 모든 포로들을 재수용하라고 강력히 요청했다. 탈출한 포로들은 대부분 지방주민들과 섞여버렸고 더구나 한국정부 당국이 비호해주었기 때문에 그들을 재수감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반공포로들의 탈출 소식을 확인한 이 대통령은 “제네바협약과 인권정신에 의하여 반공 한인포로는 벌써 다 석방되었어야 할 것인데… (중략) 국제 관계로 인해 불공평하게 그 사람들을 너무 오래 구속했었다. (중략) 그러므로 내가 책임을 지고 반공 한인포로를 석방하라고 명령하였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유엔군에 속한 우방국도 반공포로 석방소식에 크게 놀랐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 수상은 아침에 면도를 하다가 이 소식을 듣고 놀란 나머지 얼굴을 베였다는 일화도 있고, 미국은 이승만 대통령의 ‘독단적인 결단’에 분개해서 그를 제거하려는 계획까지 수립할 정도였다.
처음에는 휴전협상이 결렬될 것이라는 시선도 있었으나, 시간이 지나자 자유 진영의 여론도 반공포로 석방에 지지를 보내는 우호적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미국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1953.10.1.), 장기간의 경제원조, 국군 증강 등을 조건으로 해서 이승만의 휴전 동의를 얻게 된다. 공산군 측은 반공포로의 재수용을 주장하지만, 결국 휴전협정에 조인하면서 반공포로는 무사히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