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이 낳은 최고의 예술가이자 독립운동가로 잘 알려진 왕평선생은 황성옛터 등의 노랫말을 작사해 나라잃은 민족의 애환을 달랬다. 작사가 , 극작가, 연극 영화배우로 맹활약한 왕평선생은 1940년 7월31일 평북강계에서 32세의 짧은 생을 무대위에서 마감했다. 요즘 지역문화계와 시민단체에서 왕평 이응호 선생에 대한 훈장추서 등 재조명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본보는 채널경북과 함께 왕평선생의 친 동생인 이응린옹을 초청해 왕평선생에 대한 생생한 기억들을 정리했다. -왕평선생의 성장가정과 가족사영천시 성내동 13번지가 살던 주소이다. 영천시청에 가면 가족등록부에 내 이름까지 있다. 나머지 동생들은 청송에서 태어났다. 동생이 2명있고 여동생 1명. 위에 형님 한분이 계셨는데 돌아가셨다. 왕평 형님의 묘는 청송에 있다. 청송군에서는 당신들 부모 형제가 여기 살아서 왕평이 왕래를 했었다, 청송 수정사 입구에 우리 일가가 있었는데 거기 솔밭에 왕평 노래비가 있다. 우리 형님(왕평)이 역사적으로 청송에 이렇게 남고 있구나 싶어서 마음속 깊이 자랑거리로 삼고 있다. -왕평선생의 성장과정은아버지한테 들은 바에 의하면, 왕평형님은 서당에 다니다가 그길로 자수성가 했다고 들었다. 온갖 고생을 하면서 배우가 되고, 문학가로 살았다. 아마 문화공보부에 형님 작품 190편이 등록돼있는 것으로 안다. 어렵게 커서 어렵게 고생해서 어렵게 성공하고, 어렵게 돌아가셨다고 생각한다. -왕평형님에 대한 추억이 있다면?내가 다섯 살때 영천을 떠났다. 일본 고등계 형사한테 쫓겨서다. 청송 수정사란 곳에서 아버지가 스님이 됐다. 아버지는 일제의 수탈을 피해 청송으로 피난 간 것이다.아버지는 청송군 뿐만 아니라 영천에서 선비셨다. 내가 1950년에 아버지가 영천에 찾아오셔서 조양각에 올라가서 시를 지으셨다. 지금도 내방 액자에 걸려있다. 그 시에 보면, 어리고 어릴 때 고향을 떠나서 지금 돌아와 보니 산천초목은 옛날과 같은데 흘러가는 세상은 다르더라. 라는 내용이 있다. 왕평 형님은 내가 어릴때라 큰 기억은 없지만 아버지 계실 때 청송에 자주 왔다. 행동을 잘못하면 왜놈경찰이 알 수도 있어서 밤에 와서 낮에 가곤 했다. 형수가 나품심이었는데, 청송 수정사에 형님 돌아가시고 49제 할 때 계시다가 그 이후에 서울가서 행방이 묘연했다. 나중에 들으니 이북 갔다는 소리도 있었다. -왕평이 청송에 사셨다던데.청송에 아버지랑 형제가 있었다. 청송에 간 것은, 아버지가 성내동 13번지에서 컸는데 왜놈 고등계형사가 왕평 때문에 아마 우리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때 아버지가 피난을 가서 스님이 됐다. 스님이 돼서 군위 고로 인각사에 갔다가 청송으로 넘어갔다. -영천극장의 설립시기는 언제쯤으로 기억되는가?영천극장은 1942년도에 세워졌다. 그때 홍일주라는 사장이었는데 그 사위가 일가 어른의 벽주씨라고 보현산 밑에 있었다. 영천극장에서 연극을 하며 사람도 많이 모이곤 했다. 그리고 사물놀이 등 북, 징을 치며 공연 했던것이 기억에 제일 많이 남는다. -왕평선생의 글씨로 쓴 비석은 어디에 있는지서울 왕십리에 비문이 적힌 비석이 존재한다. 옛날 비문까지 소장하였지만, 6.25때에 왕평 비석이 훼손되고, 사진과 유적을 청통 수정사에서 보관하였지만, 불에 타 없어지게 되었다. 왕평선생에 대한 남아있는 자료는 존재하지 않고 있다. 이동순 교수가 왕평선생에 대한 논문을 쓰셨고, 그리고 제가 살았던 숭렬당 근처의 사진을 보관하고 있지만, 집은 없어진 상태이다. 그리고 왕평선생 생가에 오동나무에 반달이 걸려 있는데, 왕평선생이 객지에 있으면서 오동나무에 걸린 달을 보며 고향을 생각했다는 일화도 있다. -영천초등 배제학당에 왕평선생의 수학기록이 왜 없는지왕평선생이 어릴적에 서당에 다녔다. 그래서 수학기록이 없을 것이다. -왕평선생의 작고에 대해내가 초등학교 4학년때(당시 14살)때였다. 기억나는 일은 일제시대에 초등학교때부터 모심기 봉사를 시켰다. 서울에서 아버지를 모시러 왔다. 왕평이 강계에서 돌아가셨다며 서울에서 아버지를 모시러 온 것이 기억난다. 아버지가 화장해 고향으로 들고 오셨다. 저하고 아버지 형님이 모여 사람들이 안다니는 골짜기에 묻어 드렸다. 순사가 알기라도 하면 큰일이 나기에 그랬다. 며칠 후 순사가 찾아와 왕평선생의 재를 어떻게 했느냐고 물었다. 저기 근처 임하댐 상류에 버렸다고 하니 조용히 순사들이 나갔던 일이 생각이 남는다. -왕평선생 재조명 서훈건에 대해 어떤 심정이냐문화원에서 왕평선생의 일대기를 담은 서류를 보았다. 그리고 한 나라의 역사를 기록하고 남기는 일에 영천시민들의 관심 부탁드린다. 왕평선생을 더욱 알리고 빛낼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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