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많은 시민들이 풍수에 대해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에 본지에서는 2016년 1월부터 우리 향토출신 풍수지리 전문가 양삼열(楊三烈)교수의 글을 연재한다. 이 글을 통해 올바로 정립된 풍수학문의 전달과 풍수인식에 대한 잘못된 사고 등 풍수전반에 관한 유익한 정보와 지식을 전달함으로서 애독자 여러분들의 일상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풍수에서는 반달(半月) 혹은 초승달 모양의 지세(地勢)를 양택적 길지로 본다. 초승달과 반달은 막 시작하거나 아직 성장하고 있는 과정의 형태이므로 앞으로 무한한 발전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달은 차면 기운다고 했듯이 보름달은 차고 넘쳐 기울어져가는 달이므로 풍수에서는 그러한 의미의 지세보다는 초승달이나 반달형국의 지세를 더 선호한다. 그래서 반달형의 지세를 풍수적 길지로 보고 그러한 곳에 도읍지를 정하거나 주택을 지어 살게 되면 모든 기운이 상승하므로 그로인한 발복과 장래의 발전성을 가져다주는 땅으로 생각한다. 풍수이론이 막 흥행하기 시작하던 삼국시대에는 신라, 백제, 고구려 모두가 나라의 도읍지를 반월형 터전에 자리 잡고 있다. 신라의 수도 반월성과 백제가 수도로 삼은 부여도 반월형이고 고구려가 평양을 수도로 삼은 것 역시 지세가 행주형(돛단배:半月 모양)이기 때문이었다.
신라의 석탈해(?~80)가 반월성에 자리를 잡아 살면서 왕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삼국유사』에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용성국(龍城國)의 왕과 적녀국(績女國)의 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탈해가 어느 날 토함산에 올라 서쪽 육촌을 바라보니 반월모양의 땅이 무척 좋아보였다. 누구의 땅인가 확인해보니 신라의 중신 호공의 집이였고, 탈해는 이 집을 빼앗을 욕심으로 한 가지 계략을 꾸미게 된다. 해가 지고 어두운 저녁이 되자 호공의 집 주변에 몰래 쇠붙이와 숯을 많이 묻어두고 다음날 호공의 집을 방문하여 “이집은 원래 우리 조상들의 집이니 집을 돌려 달라”하였다.
호공이 놀라며 증거를 대라고 하자 탈해는 서슴치 않고 “우리조상이 여기서 오래 살다가 잠시 다른 지역으로 간 것인데 집터 주변을 파보면 그 증거물들이 나올 것이요. 우리조상은 원래 쇠를 다루던 대장 장이였소.” 하고 스스럼없이 말을 하니 억울한 호공이 시비를 가려 달라고 관청에 송사를 걸었다. 드디어 재판 날 탈해의 말대로 집주변을 파보니 과연 숯이 많이 나왔고, 이에 관아에서는 탈해의 집이라 인정하고 재판을 마쳤다. 이 내막을 알게 된 신라의 제2대 남해왕은 탈해가 보통사람이 아니란 걸 알고 큰딸 아효(阿孝)공주의 사위로 삼게 되니 탈해는 왕가의 맏사위가 된다. 그런 후 탈해는 그 집터의 발복(發福)으로 3대 유리왕을 지나 4대째 신라의 왕이 되었다. 이 이야기는『삼국유사』에 기록이 된 내용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풍수에 관한 기록이다. 이것은 풍수가 중국 당나라로부터 유입되기 전 우리나라에도 자생풍수가 있었다는 중요한 증거 자료가 된다. 집터를 차지하게 된 과정이야 억지를 부렸지만 그 집으로 말미암아 왕가에 사위가 되고 훗날 왕좌에까지 올랐으니 좋은 터에는 그만한 발복이 따른다는 이치가 성립되므로 풍수 애호가들은 집터를 선정할 때 반드시 풍수적 길흉을 살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