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을 치는(撞鐘) 것은 어느 방면(某面)에서 적이 공격해 온다는 신호이다. 북쪽이면 한 번, 남쪽이면 두 번, 동쪽이면 세 번, 서쪽이면 네 번이다. 그리고 만일 4면이나 2면·3면에서 모두 올 경우에는 종소리를 계속 울리고 그치지 않는다. 종은 성(城)을 지킬 때에 계엄(戒嚴)하는 기구이니, 바로 지금의 인정(人定)이다. 바깥은 둥글고 안은 비어 기운을 받음이 많기 때문에 소리가 더욱 멀리 들리니, 혼란한 병사들로 하여금 계엄하여 정돈시키게 하는 것이다. 상고시대(上古時代)에 전욱(?頊)이 비룡씨(飛龍氏)에게 명하여 처음으로 종을 주조했다고 한다.
매응조(梅膺祚)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큰 고래가 물결을 치면 그 소리가 우레처럼 크고 물을 뿜으면 비를 이루므로 수족(水族)들이 모두 두려워한다. 바닷가에 포뢰(蒲牢)라는 짐승이 있는데 소리가 종처럼 큰바, 본래 고래를 두려워하여 고래가 뛰놀던 그때마다 운다. 그러므로 종을 주조할 때에 포뢰의 모양을 만들고 그 위에 고래 모양을 만들어 놓는 것이다.” 물건을 들어 치는 것을 당(撞)이라 한다.「예기(禮記)」《학기(學記)》에 “질문에 대답을 잘하는 자는 종을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다.”하였다.
어느 방면(某方)이란, 혹은 동쪽이거나 혹은 서쪽이어서 그 방향을 정할 수 없음을 이른다. “성을 지킬 때에는 어느 방면을 불구하고 모두 철저히 수비하여야 한다. 적이 만일 동남쪽을 침범하더라도 또한 서북쪽을 방비하여 이곳을 지키면서도 저 곳에 수비태세가 나타나게 하여 적으로 하여금 틈탈 만한 허점이 없게 만든 뒤에야 수어(守禦)하는 방략을 안다고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옛날에 한(漢)나라가 관군(官軍)을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킨 오(吳)나라를 토벌하였는데, 오군(吳軍)이 관군의 성벽 동남쪽으로 몰려오자, 대장(大將) 주아부(周亞夫)는 서북쪽을 대비하게 하였는데 얼마 후 오군은 과연 서북쪽으로 몰려왔다. 그러나 관군의 대비가 철저하여 오군은 끝내 들어갈 수가 없었다.”
조선시대에는 읍성이 있는 군현 가운데 여러 군데에 시보기구 역할을 하는 종이 있어 이 신혼종에 맞추어 성문을 여닫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우선 신혼종은 행정적으로 중요한 도시에 있었다. 평양에서는 중심가 대동문 읍호루에 종을 걸어 저녁과 아침을 알리고, 1587년에는 관찰사 김수가 2층의 십자각을 세워 밤에 경고를 두드렸으며, 전주에서는 국초에 읍성을 지을 때 4대문에 모두 커다란 종을 걸었는데 전주에서 파루종을 친 것은 유희춘의 일기에도 등장한다. 유수부의 경우 모두 종이 있었다. 개성의 경우 1563년에 화재로 사라진 개성 교외 연복사의 종을 남문루에 옮겨 걸어 신혼종으로 사용하였고, 강화의 종은 1711년 강화유수 윤지완이 정족산성에서 주조하여 강화부성으로 옮겨 온 것으로서 강화부 관아 바로 남쪽 큰길가에 있었다. 한편 수원의 경우 정조 때 화성 사거리에 종루를 지어 종을 걸었는데 이는 고려 때 개성에서 만들어져 옛 수원부 만의사에 옮겨진 것을 화성을 축조하면서 옮겨온 것이다. 광주 남한산성에도 종이 있었음은 종각이 문헌과 지도에 나타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둘째로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에서는 신혼종이 적극적으로 사용되었다. 본래 종은 군사를 불러모을 때나 급박한 상황을 알리는데 쓰이기도 했는데 이때는 종을 빠르게 거푸 쳐서 알렸다. 궁성에서 군사들을 집합시킬 때 사용했던 첩종과 첩고(疊鼓)도 이와 같은 것이며, 이것은 절의 범종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실전에서는 적이 공격해 오는 방향을 알리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사실 앞의 개성, 강화, 수원, 광주 등 유수부는 조선후기에는 행정적인 측면보다도 왕도의 외곽방위 군사기지로서의 역할이 컸으므로 종이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일부 병영, 수영에도 종을 두었다. 충남 보령의 충청수영과 경상좌병영이 있던 울산의 학성관 남쪽에도 종루가 있었다. 병영, 수영의 종은 군사용 신호와 신혼종으로서의 역할을 겸했을 것이다.
이 밖에도 몇 군데 거진(巨鎭)에 신혼종이 있었는데 경주, 안동, 남원, 의주 등을 들 수 있다. 경주에는 유명한 성덕대왕신종이 있어 인근 백여 리에 울린다고 할만큼 시종으로서의 성능이 좋았는데 1460년에 영묘사에 옮겨 걸었다가 1506년에 남문 밖에 건물을 지어 걸어두고 군사를 징발할 때나 성문을 열고 닫을 때 쳤다고 한다. 안동은 경주와 마찬가지로 경상도의 거진으로서 성문루에 종이 있었다. 그런데 1469년에 강원도 상원사로 종을 옮겨간 후로는 뿔나팔을 불어 군사를 동원하고 인정, 파루를 알리다가 거진에 종이 없어서는 안된다 하여 동림사의 작은 종을 걸었다가 다시 인암사의 중간 크기 종으로 바꿔 걸었다. 전라도 거진으로 정유재란 때의 격전지였던 남원에도 남문루인 완월루에는 종이 걸려 있어 저녁과 새벽을 알렸는데, 이는 ‘춘향가’에서도 확인된다. 한편 평안도의 거진 의주에도 2간짜리 종각이 있었던 것이 고문서에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