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는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있 었고 육지에는 권응수장군이 있었으 니 그 공적을 감당할 자 없었도다...신 하들이 이와 같으면 나라는 망하지 않 았다.” 남공철이 지은「 영천복성비명」 에 이와 같이 기록하고 있으며, 또 번 암 채제공은 『충의공실기서문』에서 “영남은 나라의 근본이고 영천은 영 남의 요충지이다. 나라에 영남이 없으 면 나라가 될 수 없으며 영남에 영천 이 없으면 영남이 될 수 없다. ” 고 하 여 임란시 영천복성을 하는데 있어서 권응수 장군을 비롯한 이 지역민들의 혼연일체가 된 충의정신과 영천지역이 임란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잘 알려주는 대목이다 권응수(權應銖)장군(1546~1608)은 신녕현 추곡리에서 능라군 덕신과 정경 부인 성주이씨의 두 아들 중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본관이 안동, 자가 중평 호 는 백운재이다. 어려서부터 인물됨이 대 범하고 우뚝하였으며 효성이 지극하였 다. 경전과 사서에 널리 통하였고 궁마 도 겸하여 문무를 겸전하였다. 선조17 년(1584)별시 무과에 급제하여 이후 경 상좌수사 박홍(朴泓)의 막하에 있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이 지역에서 최초로 창의 하여 1592년 5월부터 고향 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 여러 곳에서 전 과를 올리고, 6월에 경상좌도 병마절도 사 박진(朴晋)의 휘하에 들어갔다가, 7 월에 각 고을의 의병장을 규합하여 의 병 대장이 되었다. 이 무렵 영천에 있던 적군은 신녕·안동에 있던 적군과 연락 하면서 약탈을 일삼고 있었다. 그는 대 동에서 적을 격파하였고, 또 한천 전투 에서 승리하여 적이 청송으로 가는 길 을 차단하였으며, 7월 14일 박연(朴淵) 에서 적을 공격하여 궤멸시키고, 거림 원의 적을 공격하여 군위로 가는 길을 끊었다. 22일에는 소계(召溪)·사천(沙川) 까지 추격하여 격파하였다. 7월 25일에 군사를 동원하여 공격을 시작하고, 26 일에는 결사대 원 5백명을 적 진으로 돌격시 켜 격파하고, 다 음날에 총대장 권응수는 의병 을 ‘창의정용군’ 이라 칭하고 화 공(火攻)을 전 개하여 영천성 을 수복하였다. 이리하여 군위, 의성, 비 안, 예천 등의 적들이 모두 강우지역으 로 숨었고, 영남좌도가 보존된 것은 권 응수 장군의 힘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영천성 탈환 전투의 가치를 평가한 다면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주둔하 고 있던 성곽을 공격해 점령한 최초의 전투였으며, 일부 임진왜란 연구자들 은 이 전투를 “ 임진왜란 지상전 최초 의 승리”라고 평가하기도 하는 역사적 인 승리였다. 만년에는 정사를 귀수 위에다 짓고 생도들을 교육하였으며 산수와 문적 을 즐겼는데 임금께서 이 사실을 듣고 “무공을 세우고 학문의 가르침을 밝혔 다. ” 하면서 『심경』과 『좌전』『 대학』, 『소학』 등을 하사했다. 권응수 장군의 묘소는 영천시 청통 면 애련리(愛蓮里)에 있으며,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신령의 경덕사(敬德祠) 에 제향되어 충의(忠毅)라는 시호가 내 려졌다. 현재『 백운재실기(白雲齋實紀)』 가 남아있다. 영천시 신녕면 치산리에 구천서원(龜川書院)과 어사영각(御賜影閣)이 있으며, 그의 유물은 보물 668호 로 지정되어 현재 국립진주박물관에 위 탁 관리되고 있다. 그가 사용한 장검과 교지 유서 등이 남아 있으며 공신 책봉 과 관련된 선무2등공신교지, 태평회맹 도병풍, 용연, 영정 등이 남아 있다. 임란 후, 예나 지금이나 공적을 시샘 하는 무리들에 의해 무고로 옥살이도 하였지만 그의 혁혁한 공적은 주머니 속에 송곳과 같이 언제나 드러나 만고 에 빛을 발한다. 영천성 수복 후 몇 백년이 지난 현재 의 영천의 성곽은 아직도 소박하나마 역사적 흔적을 간직하고 있지만, 거의 훼손된 성곽이 역사적 가치가 있는 우 리문화유산으로 복원되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