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청통면 유일한 국보가 있는 거 조암을 가노라면 아름드리 소나무 숲 을 지나 절 못미처팔공산 작은 계곡 에 자리한 신원재는 윤긍(尹兢,?~1493 년) 선생의 묘소를 수호하기 위해 세 운 재실로 윤긍이 말년에 후학을 양성 하기위해 칩거한 곳이다. 윤긍의 본관은 영천이며 초명은 흠 (欽)이며 자는 경부(敬夫) 호는 죽재 (竹齋) 성균생원 증 이조참판 윤헌(尹憲)의 아들이다. 슬하에 2남 2녀를 두 었으며 아들은 충무위 중부 부사직, 윤무형(尹畝亨)과 충순위 윤견형(尹견 亨)이다. 윤긍 선생은 어려서부터 총명 민첩 하고, 일찍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16세 때 이미 생원진사 사마양시에 합격한 천재였다. 그 후 1450년(문종 즉위) 식 년문과에 급제하였지만, 효성이 지극 한 그는 아버지 윤헌이 팔십이 넘어 노 쇠하였으므로, 부모 걱정에 사직하여 고향에 돌아왔다가 이웃 고을 의성의 훈도(訓導)에 제수되었다. 3년 뒤 윤헌 이 왕에게 상소하여 “자신이 오래 산 다는 것은 바로 족히 자식의 벼슬길을 막는 것이라 여겨 아침저녁으로 어버 이를 따뜻이 모시는 것은 효(孝)의 작 은 것이며, 임금을 섬겨서 이름을 드 러내는 것은 효의 큰 것입니다.” 본인 은 딸들이 봉양하고 있으니, 윤긍에게 다시 벼슬을 내려줄 것을 청하여 그가 다시 벼슬길에 나가게 되었다. 1489년(성종20)사간원 헌납을 거쳐 1490년 이조정랑 재임시 일두 정여창 (鄭汝昌), 한훤당 김굉필(金宏弼) 등을 참봉에 임명하게 하는 등 인재를 천거 하여 나라와 선비들의 기풍을 바로 잡 음에 전력을 다하였다. 이조정랑이란 직책은 관리임명을 담당하는 직책으 로 인사권을 가진 청요직으로 품계는 높지 않으나 누구나 탐내는 자리였다. 어느날 성종임금이 신하들에게 “내 집에 쥐가 있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고 묻자, 자리에 있던 다른 신하들은 대답하지 못하였는데, 그가 고양이를 기르는 집에서는 쥐떼들이 함부로 행 세하지 못한다(충신이 임금을 섬기는 곳에는 간신배들은 설자리가 없다)고 대답하여 임금이 크게 기뻐하고 칭찬 하여서 당장 통정대부로 승계, 사헌부 를 거쳐 호조참의에 제수되고 집안의 법도가 매우 엄하여, 관리로서 청백(淸白)하다 하여, 이조 참의에 발탁되었 다. 또한 고향인 대재촌(大才村)은 원 래 장승촌(長承村)이었는데 임금이 선 생의 재주가 많음을 칭찬하여 마을 이 름을 대재촌이라 고치게 하였다. 사헌부에 근무할 때 당시 영의정인 노사신의 청탁사항을 탄핵하는 과정 에서 공직자로서 멸 사봉공의 소신으 로 임금에게도 두려움없이 직간하였으 며, 자신의 안위보다는 백성들의 억울 함과 민폐에 대해 과감히 대응하여 임 금에게도 정책에 대한 진언을 서슴치 않고 할 수 있는 소신 있는 정치인으로 성품이 강직하고, 몸가짐을 경계하고 옳은 일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 니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공경하 였다. 성종22년(1491) 노병으로 벼슬을 그 만두고 영천 서쪽 팔공산에 들어가 성 리학을 강론하고그 지방의 풍속을 교 화시키기 위해 고을 선비들에게 바른 생활을 하도록 향당(鄕黨)에 있으면서 남의 장단점을 말하는 것과 토주(土主 원)의 시비를 말하는 것을 경계하는 잠(箴)인 ‘정향풍잠(正鄕風箴)’을 지어 걸어 두니, 사람들이 모두 공경하며 흠 모하였다. 당시 선비 점필재 김종직, 사 가정 서거정, 추강 남효온 등과 학문을 교유하였다. 신원사 계 곡을 잔 잔히 흘 려내리는 맑은 물줄기는 영천을 거쳐 금호강에 스며들어 지금도 그 자리에 흘려들듯 이 관직에 나아가서는 올곧은 선비정 신을 실천하고 귀향해서는 고향의 미 풍양속을 힘써 실천한 윤긍선생을 통 해 오늘날 공직자 들에게 무언의 귀감 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