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 내남면은 경주부의 남쪽에 있 다는 뜻으로 부남면으로 부르다가 일제 시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경주부의 남 쪽 안에 있다고 하여 내남면이라 불렀다. 이곳은 동으로는 외동읍과 경계하고 남 으로는 울산, 서북쪽으로는 산내면과 경 계를 하고 있는 안쪽지역이다. 이곳의 지 형은 금오산과 고위산을 잇는 금오산맥 (金鰲山脈)과 단석산과 고헌산을 잇는 주 사산맥(朱砂山脈)이 남쪽으로 뻗쳐있어 東과 西의 경계선을 이루고, 이들 산맥 사 이로 흘러내리는 물이 경주의 젖줄인 형 산강의 발원지이다. 형산강의 상류지역인 내남면은 넓은 평 야와 더불어 토지가 비옥하고 수(水)량이 풍부해 일찍부터 부자의 마을이 되는데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었다. 이곳은 최부자의 1代 최진립이 개척한 마을로 그들이 약 150여 년간 정착하여 살았기 때문에 최부자 300여 년의 절반 이 이곳에서 이루어 졌다. 최부자 출발점이 이 마을이라는 점에서 그들 가문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의미는 크다. 그들은 富의 증식에 유리한 마을의 풍수적 입지조건과 더불어 이곳에서 많 은 재산을 증식하게 된다. 물이 풍부한 이조리의 마을 형국은 풍 수적으로 볼 때 행주형(배가 물위에 떠있 는 모양)이다. 행주형은 재산은 많이 불어 날 수가 있지만 불어난 재산으로 배에 짐 이 가득차면 가라앉기 때문에 곧 떠나야 한다고 해석한다. 또한 행주형국은 마을에 우물을 파면 배가 가라앉는다는 이론 때문에 우물을 팔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최부자는 이곳에서 많은 재산이 불어 나자 행주형국의 이치에 부합하듯 이조리 를 떠나 교동으로 이거하게 되었다. 최부자의 1代 최진립 부터 최동량(2), 최국선(3), 최의기(4), 최승렬(5), 최종률 (6), 최언경(7代)이 살았던 건물들은 대부 분 소실되고 다행히 최진립이 살았던 충 의당이 남아있어 출발시기의 시대상을 추적해 볼 수 있다. 최진립은 27세가 되던 해(1594)에 무과 에 합격하여 임진, 병자 양란에 지대한 공 을 세웠으며 바로 12대 만석꾼의 출발 기 점에 위치한 인물이기도 하다. 충의가문은 장남 최동윤이 계승했으나 그는 병약함과 더불어 후손이 부실해지 면서 종가의 정통은 정무공의 3남인 최동 량계로 넘어갔다. 그러므로 후일 만석꾼 의 부와 명성은 최동량의 후손들로 이어 지고 이들이 바로 교촌계의 서막을 열어 갔다. 최동량은 종가를 유지하여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과 더불어 자손들을 훈계하 는 가거십훈을 남겼다. 이후 가거십훈은 후손들의 생활지침이 되었고, 근검절약과 가거십훈에 맞는 생활로 세월이 흐를수 록 재산은 점점 불어났다. 조 선시대는 풍 수학의 전성기로 최부 자 후손들도 이주지를 교촌으로 결정할 때 풍수적 조건을 많이 살펴 결정을 했다 는 기록들이 여러 책자에 남아 있다. 교동 으로의 이주도 결국 이조리 마을의 풍수 형국과 더 넓은 곳에서 더 크게 성장하고 픈 인간의 심리가 결합되어 나타난 결과 로 이해된다.
즐겨찾기+ 최종편집: 2025-05-03 19:43:16 회원가입 전체기사보기 원격
트위터페이스북밴드카카오톡네이버블로그URL복사
동정
이 사람
데스크 칼럼
가장 많이 본 뉴스
상호: 경북동부신문 / 주소: 경상북도 영천시 최무선로 280 /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경북, 다-01264 / 등록일 : 2003-06-10
발행인: 김형산 / 편집인: 양보운 / 청소년보호책임자 : 양보운 / 편집국장: 최병식 / 논설주간 조충래
mail: d3388100@hanmail.net / Tel: 054-338-8100 / Fax : 054-338-8130
본지는 신문 윤리강령 및 그 실요강을 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