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들이 이룩한 올곧은 가풍속에 연꽃이 진흙 속에서도 깨끗할 수 있다”는 것에서 자신의 호를 삼은 정우당 조치우(曺致虞, 1459~1529) 선생. 본관은 창녕이며, 자는 순경이다. 선생의 고조는 가선대부 좌익병마사 판희천군사 조신충으로 영천 입향조이다. 증조는 덕원도호부사 조상명이고, 조부는 부사직 조경무이다. 아버지는 군수 조말손이며, 부인은 숙부인 창원박씨로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은 한림 조효연과 충순위 조은진, 사위는 현령 장세침이다.조치우선생은 뛰어난 힉문과 곧은 절개로 이름이 높았다. 성종14년(1483)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된 뒤, 성종25년(1494)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로 관직에 올랐으며, 성균관전적으로 춘추관기사관이 되어《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연산군때 정치가 문란한 것을 보고 검열로서 권력을 남용하고 사관을 무시하는 권신들을 제거하도록 세차례나 상소하였고, 불교의 폐해를 고하며, 대왕대비가 명한 불경 박는 일을 파하기를 상소하였고, 임무를 다하지 못한 노사신(盧思愼)의 간사함을 밝히고 죄를 내리기를 청하였지만, 자신의 진언이 받아 들여지지 않자, 연산군의 어두운 시대를 당하여 홀로 곧은 절개를 지켰고, 무오사화의 소용돌이 속에서세상의 어떤 일도 자신의 충성심을 꺽지 못할 것이라는 굳은 의지를 지닌 선생은 관직을 사퇴하고 낙향할 정도로 바른 길을 걸었다. 1 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물러나고 정세가 바뀌자 다시 기용되어 예천 군수를 지냈지만, 중종 반정후 타협을 모르는 선생은권귀(權貴)에게 미움을 받아 외직으로 나와서 대구부사로 부임하였다. 하지만 재임하는 동안 청렴결백한 선정을 베풀어 그 이름이 높아 청백리에 녹선되었고,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송덕비를 세워 줄 정도로 청백리로 명성이 자자할 만큼 깨끗하고 근검한 선비였다.영천에서 태어난 선생은 부인인 숙부인 창원박씨가 친정의 제사가 끊긴다고 우려하자 창원으로 이사를 결행 해, 창원에서 거주하다 말년에 영천 고향으로 다시 돌아왔다.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다시 돌아와 극진히 어머니를 돌보니 효행으로 널리 알려져 왕이《 소학》1질을 하사하며 선생의 효행을 칭찬하였다고 전한다. 지극한 효성으로 어머니를 모시다가 70세에 어머니가 타계하자, 상중에 슬픔이 지나쳐서 3년 상기를 채우지 못하고 병을 얻어 이듬해인 71세에 돌아가셨다.중종이 이런 소식을 듣고 조치우의 청렴함과 옥같이 맑은 덕을 표창하기 위해 조치우 부부에게 사후 조정에서 옥비두 좌를 하사하였는데 하나는 조치우의 묘 아래에 유후재 내의 청옥비를, 한 좌는 부인묘소가 있는 경남 창원시 모선재내에 백옥비가 모셔져 있다.조선시대 경북출신의 청백리가 13명인데 임금에게 옥비를 하사받는 일은 매우 드물다. 전국에서 현재 선생외에 임금의 옥비하사는 알려진 바가없 다 . 옥비는 얼마전까지 경북 문화재 자료101호 였으나,2015년 12월말에 경북 유형문화재 490호로 승격되었다.옥처럼 고고하게 살다간 선생의 깨끗하고 근검한 생활과, 효심이 지극한 마음은 임금도 감동했고 지절(志節)과 풍운(風韻)은 더욱이 조상을 계승하여 후손들에게도 훌륭한 가르침을 주었으리라 생각된다. 1787년 밀양의 오봉서원에봉향되었으며, 오봉서원과 묘지가 있는 유후재에서 제를 지낸다. 선생의 진정한 목민으로써 청렴결백하고 선정을 베푼 청백리 정신은 오늘날 공직자가 지녀야 할 진정한 덕목으로 ‘청백으로 공무를 받들고, 효우로 집안을 위한다.’는 말처럼 우리들의 진정성을 깨우치는 듯 무성한 세월속에 유후재 옥비 앞에 말없이 서있는 위풍당당한 노송에게서 선생의 올곧은 선비의 기풍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