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영천 낮 최고기온이 39.6도로 치솟아 올해 전국 최고기온 기록을 경신했다”는 13일 보도를 고비로 올 8월의 폭염이 주춤해지는가 싶어 다행이다. 그러나 폭염경보와 주의보가 오락가락하는 상태에서, 말복이 지나도 지난 것 같지가 않다. 기후 온난화로 인한 기상이변에 시달리는 세계 도처의 사람과 사건들. 그리고 지구 반대편의 리우데자네이루에서는 우리 선수들이 선전하는 가운데 제31회 하계 올림픽이 피날레를 향해 질주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과 민족의 해방 71주년, 그리고 건국예순여덟 돌을 지냈다. 그 전날인 14일은 2차대전 중 폴란드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친’ 한 성인 사제(聖人司祭)의 순교일이었다. 1894년 1월 7일 폴란드의 즈둔스카볼라에서 태어난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는 로마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철학박사를, 보나벤투라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콘벤투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소속으로 1918년 4월 28일 사제품을 받았다. 그리고 동양 선교에도 나서서 일본에서 생활할 때, 폴란드 회의에 참석하고 나가사키로 돌아갈 때 경의선과 경부선을 타고 부산에 도착했는데, 아우 사제에게 보낸편지에 이렇게 쓰기도 했다. “한국은 내가 전혀 모르는 나라였다. 그 경치를 구경하고 또 구경해도 싫증이 나지 않은 아름다운 나라였고, 부산은 한국의 마지막 기착지였다. 여기서 놀라운 일을 알게 되었다. 기차에서 내려 시모노세키로 가는 배에 오르기 전에 4시간이나 있어서 미사를 드리려고 성당을 찾았으나 위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1936년 귀국한 그는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 동료 수도자들과 함께 나치에 체포되어 수용소에 갇혔다가 곧 풀려났다. 이후 그는 가난한 이들과 박해받는 유대인들을 자신이 설립한 ‘원죄 없으신 성모의 마을’에 거주토록 하면서, 이들을 보호하고 돕기위해 노력했다. 1941년 그가 “자유”라는 기고문을 발표하자, 나치는 유대인들을 도왔다는 이유로 2월 17일 그를 체포해 바르샤바의 파비악 형무소에 감금했다가 2월 28일 ‘죽음의 수용소’라 불리는 아우슈비츠로 옮겼다. 가톨릭 신부라는 이유로 더욱 혹독한 매질과 고문과 형벌을 받으면서도, 동료수감자들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끊임없이 격려했다. 그러던 중 1941년 7월 말경, 한 수감자가 수용소를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나치는 한 명이 탈출하면 그 벌로 열 명을 임의로 추출해서 아사형에 처하도록 명령했다. 나치에 의해 지목된 열 명의 처형자 중 한 폴란드 남자가 자기에게는 가족과 아이들이 있다고 울부짖자, 수인 번호 ‘16670’번을 단 막시밀리아노 신부가 자원해서 그를 대신해 죽겠다며 수용소장 앞으로 걸어 나갔다.“너는 누구냐?” “가톨릭 사제입니다.”신부는 수도자라고 하지 않았다. 프란치스코회원이라고도 하지 않았으며, ‘원죄없으신 성모 기사회’의 창립자는 물론 회원이라고도 하지 않았다. 다만 사제라고 했다. 그는 사제로서 죽을 것이고, 사제이기 때문에 죽으려고 하는 것이다. 결국 그는 다른 아홉 명과 함께 지하 감옥에 갇혀 형벌을 받았다. 다른 동료들이 모두 굶어 죽을 때까지 2주 이상을 물과 음식 없이 생존한 그에게 나치는 결국 독극물 페놀을 주사했고, 이로써 그는 1941년 8월 14일 성모승천 대축일 전야에 아우슈비츠의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다. 오늘날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신부가 죽음을 맞이한 감옥은 수많은 순례자들이 찾는 장소가 되었고, 지난달 말 제31차 세계청년대회에 참석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크라쿠프 방문 사흘째를 맞아, 7월 29일 금요일 오전 나치 강제 수용소였던 아우슈비츠와 비르케나우 기념관과 박물관을 방문했다. 교황은 이곳을 방문하기 전 연설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대신 혼자 침묵의 기도를 할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요청했다. “저는 비극이 깃든 장소를 연설도 관중도 없이 꼭 필요한 소수의 인원들과 방문하고 싶습니다. 혼자 들어가서 기도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제가 울 수 있는 은총을 허락해 주시길 바랍니다.” 교황은 기자들의 사진 찍는 소리를 뒤로하고 조용히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고 적혀있는 수용소의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교황은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가 낯선 이였던 프란치세크 가요프니체크를 대신해 75년 전 죽음을 맞은 11번 막사를 방문하고 고통의 현장에서 기도를 드렸다. 교황은 또한 이젠 노인이 된 아우슈비츠 수용소 생존자들과도 만났다. 일일이 포옹으로 인사를 하고 손을 마주잡았다. 교황은 수용소를 돌아보며, 사람들을 강제로 데려와 가스실로 보내던 기차의 선로를 바라보았다. 이어 유대교의 랍비가 히브리어로 시편 130장을 낭독한 후 교황이 집으로 돌아가지못한 이들을 기억하는 죽음의 벽 앞에서 큰 촛불을 헌정했으며 방명록에 ‘주님 당신 백성에게 자비를 보이소서!?주님 엄청난 잔인함을 용서하소서!’라고 스페인어로 기록한 뒤 서명했다. 1948년 콜베 신부에 대한 시복 절차가 시작되어 마침내 1971년 10월 17일 교황 복자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2년 10월 10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가 ‘자비의 순교자’(Martyr of Charity)라는 칭호와 함께 그를 성인으로 선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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