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마땅히 나라를 위하여 적을 토벌한 것이니 공은 나의 뜻이 아닙니다”임란이 끝나고 조정에서 논공행상을 이야기 할 때 호수공 정세아 선생의 말이다.사람들은 어떤 일을 하고나서 대가를 바라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특히 전쟁을 치르고 나서는 반드시 논공행상을 실행한다.
공은 문중의 광영으로 여러모로 특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이 올린 장계에 “영천 진사 정세아 등 60여인이 5월 중에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켰고, 7월 27일 권응수와 함께 영천의 적을 섬멸했으며,...”라고 했다.
정세아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족으로서의 사회적 책무를 다하고자 했지만, 논공행상에는 초연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대목만 봐도 호수공의 인품이 어떤지를 쉽게 가늠할 수 있다.
정세아(鄭世雅,1535~1612)의 자는 화숙, 호는 호수, 시호는 강의다. 아버지는 정윤량으로 자양서당과 임고서원을 친구인 노수, 김응생 등과 함께 자비를 털어 창건하여 영천지역의 교육문화 창달에 크게 기여하였던 인물로 퇴계 이황의 문인이다.
호수공은 24세인 명종13년에 사마시에 2등으로 합격하였지만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일생을 자양 산장의 강호정사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학문을 닦아 덕망이 높았던 선비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왜군이 침입하면서 임금이 서북으로 피난하고 경주진과 영천읍성이 함락되는 불행한 일이 일어나자 선생은 책을 덮고 나라에 몸 바칠것을 결심하고 일어섰다.
조희익, 류몽서, 세아들 의번, 안번, 수번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900여 명이 모였으며,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박연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아들 의번을 대동하고 문천회맹에 참석하여 여러 의사들과 항전의 결의를 다졌다.
1차 경주성복성전때 영천의병의 선봉장으로 참전하여 서천전투에서 적의 대병을 맞아 결사항전 하였으나 적에게 포위되어 맏아들 의번이 순절하는 큰아픔을 겪기도 하였다.
선조왕 27년 영천 창암과 10월의 부산성전투에 참전하여 적을 격파하고, 선조 29년(1596) 9월 팔공산회맹에 참가하였으며.
선조30년(1597) 7월21일에는 찬영으로 달려가 방어사 곽재우가 지휘하는 화왕산회맹에 참가하여 수성에 공이 함께하였다.명나라 이여송장군이 군사를 이끌고 조선에 들어와 삼경을 회복하고 피난갔던 선조임금도 서울로 돌아오자 자신의 병사를 조희익에게 귀속시키고, 고향인 자양으로 돌아와 강호정사의 벽위에 시를 지어 국가의 위기상황에서 아들과 함께한 호수공은 당시 가족을 중시한 사회에서 국가의 진정한 주인정신을 실천한 참선비였다.
정승 오리 이원익의 방문에 이어 금계 황준량, 창석 이준, 지산 조호익, 여헌 장현광, 모당 손처눌 등과 학론을 교유하며 전란에 지쳤던 심신을 수습해 부질없는 인간사의 탐욕을 벗어버리고 강호로 돌아가서유유자적한 선비의 삶을 누렸던 것이다.
자연을 사랑했던 그의 호 호수처럼 강가에 낚시를 드리우고 조용히 인생을 관조하면서 78세의 천수를 누렸다.
그후 전공으로 선무원종공신3등에 녹훈되고, 이후 영조8년(1733)에는 자헌대부병조판서(資憲大夫 兵曹判書)로 추증되었다.
환고세덕사에 제향되었고,《 호수실기》가 전한다.
그 이후 자헌대부에 병조판서겸 지의금부사로 시호가 강의공(剛義公)으로 내려졌다.조상 대대로 영천에서 살아온 사대부 가문으로 퇴계문에 수학하여 학명을 떨쳤던 아버지 효자 정윤량, 그는 자양서원과 더불어 임고서원을 세웠다.
아들 정세아는 난리 중에 불타버린 임고서원을 다시 중건하였으며 허물어진 인심을 다스리고 예를 숭상하여 향풍을 바로 잡으니 고을이 모두 그의 덕을 따랐다.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뜻을 받들어 홀연히 나섰다. 호수공의 맏아들 정의번의 아들 정호례는 부친이 왜놈에게 죽었다 하여 평생 왜구의 물건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그들의 충과 효, 예, 의 에 대한 DNA 는 세대를 거쳐 아버지들에게서 아들들에게 지금도 자양호를 거쳐 문중후손들에게 가슴속 깊숙이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