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의 최후 보루였던 영천전투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영천시보훈단체협의회 김성태 사무국장은 23일 제66회 영천대첩 행사가 영천호국원에서 개최되는 시점에 맞춰 6.25전쟁의 대반격의 전환점이 된 낙동강 전투에 있어서 영천전투야말로 영천대첩이라 불릴 정도로 가장 중요한 전투인만큼 재평가돼야 한다고 역설했다.영천전투는 북한군 입장에서도 김일성조차 “영천을 잠시 점령했을 때 전쟁 승리를 확신했으나 이를 상실했을 때 패배할 것임을 직감했다”며 통탄할 정도로 중요한 전투다.전쟁 발발 3일만에 서울을 뺏기고 낙동강방어선까지 밀려난 풍전등화의 위기상황에서 북진의 일대 전기를 이룬 영천대첩은 다부동전투와 상주 화령장전투, 영덕 장사상륙작전 등 여타 낙동강 전투중 단연 돋보이는 격전지인 만큼 재조명돼야 한다는 주장이다.영천대첩은 당시 우리 국군이 경주와 부산을 공격하려던 북한군 제15사단과 제73, 103 독립연대를 상대로 10여일동안 치열한 격전 끝에 9월13일 적을 완전히 궤멸시킴으로서 대반격작전과 인천상륙작전으로 이어지며 전쟁의 양상을 완전히 뒤바꿔놓은 주요 전투였다.영천전투 승리 후 미8군 사령관 워커장군은 “한국에서 이렇게 많은 노획물을 획득하고 큰 승리를 거둔 전투는 처음”이라며 놀라워했고 이승만 대통령은 영천전투를 단순한 전투가 아닌 ‘영천대첩’이라 칭하며 8사단의 승리를 크게 치하했다.이후 영천대첩은 8사단의 자부심이 되어 매년 9월13일 영천에서 대첩기념행사를 개최해오고 있다.올해는 13일이 추석연휴기간이라 22일로 연기돼 열리게 됐다.- 1950년 당시 상황을 보면 ;9월공세가 시작되자 북한군 15사단은 9월2일 야간에 일제히 영천을 향해 공격을 감행해 다음날 한국군 8사단 16연대의 우일선이 붕괴되면서 한국군 8사단은 영천 북방 기룡산 일대로 철수했다.좌 일선에 8사단 21연대 중앙 일선에 8사단 16연대와 7시단 3연대 1대대, 우일선에 전날 배속된 7사단 5연대를 배치하고 육본 명령으로 신녕에서 작전중이던 7시단 8연대를 영천의 8사단으로 배속시키고, 5일에는 7사단 공병대 200명을 추가로 투입, 전력을 강화했다.하지만 북한군 15사단은 북한군 2군단장 무정으로부터 심한 질책을 받은 사단장의 명령으로 9월5일 새벽 1시에 폭우속에서 기습공격을 실시, 6일 03:00시에 영천을 점령하고 경주 방면으로 진출을 시도했으나 한국군 7사단 5연대에 의해 저지됐다.8사단 공병대대가 영천읍내에 투입돼 영천을 1차 탈환했으나, 7일 야간에 다시 피탈당했다.북 한군 1 5사단은 2 개연대를 동 원해 경주방면으로 진출을 시도하던중 8일 2군단 예비로 차출된 한국군 6사단 19연대의 공격으로 영천을 재탈환했다.9일에는 동해안의 포항지구에 투입됐던 8사단 10연대를 원대복귀 시켜 임포동지역에서 북한군의 진출을 저지하고, 다부동 방면의 한국군 1사단 11연대도 지원병력으로 배속이 됐다.상황이 호전되자 좌측의 8사단 21연대가 영천 돌파구를 방어하는 가운데 한국군 8사단 10연대, 16연대, 21연대와 7사단 3연대, 5연대, 8연대 그리고 6사단 19연대 등 총 7개 연대가 반격을 개시해 10일에는 영천 일대의 북한군을 소탕하고 12일 최초 방어선을 회복했다.이 전투에서 북한군 15사단은 궤멸적 손실을 입고 전열에서 이탈했으며, 북한국 지휘부의 평가에 의하면 영천의 상실로 전체 작전의 패색이 짙어졌다고 한다.북한군은 8월 공세의 작전목표였던 대구와 부산을 점령하지 못한 채로 9월에 들어서기 전에 작전한계점에 이르고 말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앞에 다가온 승리와 한반도 공산화라는 달콤한 유혹에 젖어서, 경인지역에 위치해 있었던 최후의 예비전력까지 모두 차출하는 초강수를 두면서 까지 부산과 대구 점령을 위한 새로운 대공세를 계획하여 8월21~30일을 새로운 작전준비기간으로 정하여 9월에 다시금 공세행동을 준비했다.큰 틀에서 보면 북한은 낙동강 일대에 집약돼 있었던 국군과 미군의 병력을 두개의 공격집단으로 나누어 서쪽과 북쪽으로 나누어 타격함으써 포위, 섬멸하고 부산을 점령할 계획이었다.이러한 방침하에 서부의 북한군 1군단이 8월31일에 공세행동을 개시해 대구-부산간을 차단하고 북한군 2군단은 9월 2일에 후속하여 공격한다는 계획이 세워졌다.북한군 2군단은 왜관-포항선 일대에서 2군단 3공격 집단으로 편성된 제1사단, 3사단, 13사단으로 하여금 왜관-다부동 축선을 방어하던 미 1기병사단과 국군1사단을 돌파하여 대구를 점령하고, 4공격집단으로 편성된 제8사단, 15사단이 신녕-영천을 방어하던 국군 6사단, 8사단을 돌파하여 대구-경주 방면으로 진출, 5공격집단으로 편성된 제12사단, 5사단은 안강-포항의 국군 수도사단과 3사단을 돌파한뒤 울산-부산 방면으로 진출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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