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스럽도다! 때 못탄이내 몸이여! /뉘가 저 창해를 기우려 미친 티끌을 씻어낼꼬./ 청풍이 불어오는 대루에는 나라위한 선비뿐이요. /해지는 석양의 신정에는 기우려지는 나라를 슬퍼하는 사람뿐이니. /입이 있기에 다행히 맹세하는 피를 머금었고. /충성을 맹세하니 칼머리에 몸을 허락했도다. /저~이천리밖에 어가가 머무르고 있으니. /서쪽으로 머리돌려 사나이의 눈물을 뿌리노라!이 시(詩)는 창대 정대임 선생이 팔공산에서 의사(義士)들과 모여서 맹세할 때 지은 회맹시로 왜적의 침입에 대한 적개심과 의병을 규합하여 왜적을 물리치겠다는 피끓는 각오와 피난간 선조왕이 머물던 의주를 바라보는 착찹한 심경 등이 묘사되어 있다.임란의병은 향촌공동체를 바탕으로 자신의 지역을 지키기 위해 봉기한 부대로 향토지리에 익숙하고 지리에 알맞은 무기와 전술을 사용함으로써 적은 병력으로 대군의 적과 정면 충돌보다는 매복 기습 위장등과 같은 유격전술로 일본군에게 엄청난 타격을 입혔다.정대임(鄭大任1553~1594)선생은 자는 중경, 호는 창대(昌臺)로 영일(迎日)인이다. 고려 명신 정습명(鄭襲明)의 15세손으로 영천 녹전동에서 아버지는 정용(鄭容)이며, 어머니는 증참판 경주김씨 김응생(金應生)의 딸이다. 종조부 윤식(允湜)에게 학문을 익혔으며 경사에 해박했다. 일찍이 부모를 잃고 부모에게 효를 다하지 못함을 가슴아파했다. 어려운 백성은 재물을 베풀어 구제하는 어진 마음을 가진 분이었다 한다.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장군이 분개하여 앞장서서 재종제인 정대인(鄭大仁)과 함께 의병을 모아 향리의 정녕과 정사진, 이번, 이득룡, 조희익, 조성, 곽회근, 신준용, 김대해, 최벽남, 정천리, 정담 등 60여명이 먼저 달려왔고 더욱 용맹스러운 자를 모집하여 수백인이 모여 선생을 추대하여 대장으로 삼았다. 정대임 선생을 만난 족형인 정세아 또한 “우리선조께서 자손대대로 나라가 위급할때 마다 충성을 다해 국가의 존망을 바로하였는데 너희들도 그와 같으니 어찌 내가 눈물이 나지않겠느냐”하면서. 각각 의병을 모집하여 왜병과 치열한 전투를 치루어 승전을 거듭했다. 또한 당시 성을 버리고 산사로 도망간 영천군수 김윤국을 타일러 데려와 동참시켰으며, 당지산에서 복병으로 적을 크게 무찌르고 7월에 영천전투에 참가해 의병 100여명을 이끌고 의병대장 권응수장군의 휘하에 들어가 중총의 직책을 맡아 활약하였다. 영천에서 신령으로 이동하는 적군을 권응수장군과 함께 요격하여, 박연(朴淵)에서 대승하였다. 선생은 연이은 승전을 계기로 여러 의병장과 의논하여 영천성을 회복하기로 하고 격문을 보내어 신령, 하양, 경주, 의흥, 자인, 경산 등 열읍의 수령 및 모든 의병장에게 기일에 대중을 거느리고 와서 모이게 하고 장군이 군사를 총독하며 합세하여 드디어 영천성을 수복하였다. 또한 용궁·비안의 전투에서도 다수의 적을 참획하고 병사 박진과 함께 경주탈환전에 용맹을 떨쳤다. 1593년 여름엔 선봉장으로 울산전투에 달려가서 수십군데 상처를 입고도 전투를 독려하니 적의 기세가 꺾이어 물러갔다 한다. 군이 전쟁과 역병과 굶주림으로 시달리자, 선생은 군사를 살피기에 밤낮없이 무리를 하였다. 좌우의 사람들이 선생의 과로를 염려하자, ‘국가의 업무가 급한데 어찌 자신을 애휼(愛恤)할 겨를이 있으랴!’고 하였다 한다. 그 후 경상좌도병마우후에 제수되었으며, 1594년 2월 임금의 권유로 무과에 급제하여 특별히 옥대와 은환도를 하사받았다. 순찰사 한효순과 더불어 당교의 왜적을 격파하고 6월에 병으로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병이 조금 나아지자 선생의 의영일기를 가져오게 하여 불태우면서 말하기를 ‘나는 다른 날 요행을 바라는 자들이 이러한 문적이 입에 오르내릴까 두렵구나’ 하며 항상 왜에 대한 적개심으로 스스로를 격려하여 공훈과 명예에 마음을 두지 않았으니, 결국 4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왜란 후 선무원종공신 2등에 책록되고, 가선대부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 현재는 선생의 의기와 충절을 후손들이 영천 창대서원에 제향해 향사 지내며 그 높은 뜻을 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