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암 선바위 뒤 기암절벽에 기대어 세워진 일제당. 맑고 푸른물, 그 위에 우뚝한 선바위 기암절벽과 푸른 산을 배경으로 고고한 자태를 뽐내는 ‘날마다 오르는 집’ 일제당과 입암서원에서 손우남 선생과 입암4현을 기려본다.손우남(孫宇男1564~1623)선생은 영천 임고 매호리 동산마을에서 태어나 5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본관은 일직 휘는 우남 자는 덕보 길보 호는 윤암(綸庵)으로 정평공 죽석 손홍양(孫洪亮)의 12세손이다. 아버지는 영천 입향조인 진사 손진충이며, 어머니 의인(宜人) 영양 이씨는 통덕랑 이렴의 딸이다.부인은 의인 달성 서씨로 서일의 딸과 또 다른 부인 달성 서씨 서사달(徐思達)의 딸이다. 슬하에 3남 6녀를 두니 아들은 손해·손항·손필이다.영천에 이거한 일직손씨는 선대로부터 손우남의 아들 항에 이르기 까지 연5대 진사, 생원시에 등과한 영천에서 보기 드문 명문집안으로 영천의 유림에서 확고한 지위를 확보해 향교와 서원에서도 명분있는 역할을 담당한 집안으로 자리매김했다.어려서부터 고상한 마음과 뜻으로 1613년에 증광진사가 되었으나 학문과 교육에 뜻을 두고 정치에는 뜻이 없어 벼슬에 연연해 하지 않았다. 일찍이 문간공 지산 조호익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지산선생이 돌아가신 후에는 한강정구선생의 고제로 여헌 장현광선생의 익우로서 덕성이 순수하고 성리학에 조예가 깊고 박대암· 서낙재· 장여현· 권동봉· 정수암· 정우헌 등 제현들과 도의로서 사귀고 유풍을 일으켰다. 어버이를 섬기는 정성이 지극하여 지효(至孝)로 조정에 추천되었으나 부모를 섬김은 도리요 당연하다 여겼기에 “나는 하늘을 속였다”하며 탄식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권극립· 정사상· 정사진과 더불어 장현광을 맞아 영천의 북쪽 입암에 일제당을 중수하여 동쪽 방은 우란재라, 난초와 지초처럼 서로 좋은 향기를 내뿜는 친구를 의미하는데 장현광과 정우현이 거처했고, 열송재는 소나무가 무성한것을 보고 측백나무가 기뻐한다는 뜻으로 손우남과 정사진이 기거했다. 이곳에서 그들의 아름다운 동행은 사우와 더불어 도의를 강마하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입암에 권극립의 청으로 함께하게 된 장현광은 흰 돌에 나이 순대로 권극립 손우남 정수암 정우헌 등 네사람의 이름을 쓰게 하고 돌을 바위 굴에 묻은 뒤 세속을 떠난 깨끗한 생활의 약속을 맹약해 이들을 ‘입암사우’라 불렀다. 임진왜란을 맞아 충의와 절의로 우국동지들을 규합하여 의병을 창의하여 향군과 합작으로 작전참모로서 치밀한 계획으로 전략을 지휘하여 많은 공적을 세웠으나, 공적은 다른이들에게 돌림으로 군자의 미덕을 보였으며, 충의지행으로 향리에서도 아천(阿川) 향약을 만들어 미풍양속과 규범을 지키게 하였다. 지산 조호익의 문인들인 이희백·정담·이효남·정사진 등과 함께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소실된 임고서원을 부래산에서 도일동으로 옮겨 세우는데 큰역활을 담당했으며, 그 후 1620년 임고서원 원장으로 피천되어 충의문행(忠義文行)으로 일생을 살았다. 그후 후세는 선생의 뜻을 이어 받고자 동산서당을 짓고 그의 유풍을 사모 하여,사림의 추중으로 포항의 입암서원과 밀양의 혜산서원에 배향되었다. 목판본인『윤암일집(綸庵逸集)』이 남아있다.10월의 가을 입암에 일제당 정자위에서, 가사천 계곡의 흐르는 물소리처럼 아직도 입암4현이 도란도란 함께 글 읽는 소리가 들리는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