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살아 온 세상은 어떻게 펼쳐져 있을까. 시간이 다르고 기억이 다르고 경험이 다른 두 사람이, 어느 날부터 같은 시선으로 같은 느낌의 묶음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이 신기하고 놀랍다. 그래서 새로운 만남은 늘 신선하다.불붙는 연인은 오죽하랴.차도와 철도가 만나는 묘한 지점에서 남편은 오래도록 시간을 할애하고 있었다. 마치 저만치에서 기차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그래야만 남편의 얘기가 구체화되고 과거와 현재를 잇는 징검다리 역할을 톡톡히 할것 같은 단단한 그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다. 괜히 위험 할 것도 같은 지점에서.나는 문득 들판을 바라보았다. 웃자란 곡식들을 수확하는 손길이 분주한 농부들의 모습이 파스텔 톤으로 보였다. 그렇게 보이는 이유를 곧 알게 되었다. 안개가 엷게 깔리고 있었다. 남편의 얘기는 곡식 낱알처럼 툭툭 아래로 떨어졌지만 나는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불명확한 사물과, 들풀처럼 일어서는 정체모를 소리들. 남편의 옆구리를 찔렀다. 출발하시죠.남편의 발 은여전히 브레이크 페달에 올려 져있었다. 출발하자니까요. 약간은신경질적으로 내 목소리는 높아져 있었다. 남편은 정신과 육체가 따로 노는 듯 정신 나간 사람처럼 초점이 분명하지 않았다. 나는 유리벽을 사이에 둔 거리감으로 혼자 애간장을 끓듯 소리치고 있었다. 지금은 확실한 것은 없었다. 어쩌면 남편의 저런 모습이 멀쩡할 지도 몰랐다. 내가 애태우는 이런 마음은 남편의 관점에서 봤을 때 조급함으로 비춰져 달래고 있는 중일지 모르는 것이었다. 다만 안개와 들판의 농부와 교차점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간절함은 절실했다. 사차원의 세계라든지 전생과 이승이 연결되는 무전기라든지, 블랙홀 같은 풀지 못하는 수수께끼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물음표를 던졌던가. 여전히 한 번도 와보지 못한 곳에서 더듬더듬 찾아가는 불가사의한 일은 주위에서 전해 듣지 않는가. 일전에 본 영화가 생각났다. 나무가 바람에 흔들거리며 전파하는 바이러스로 사람들이 미쳐가고 있는 호러물이었다. 남편은 차도와 철도의 교차점에서 미쳐가고 나는 안개의 부드러움에 녹아가고 있다. 뭔가 덜컹거렸다. 남편의 발이 엑셀 페달을 밟고 있었다. 살았구나. 이 교차점만 벗어나도 우리의 최면은 풀릴 것 같았다. 교차점의 공간을 메우기 위해 채워 놓은 부목을 벗어난 차바퀴는 몇 번 요동치더니 정상 길에 올라섰다. 정말 남편의 초점이 또렷해졌다. 나는 뒤를 돌아봤다. 우리가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지나온 시간의 풍경을. 들판의 농부들은좀비처럼 안개 속을 헤매고 있었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는 시간의 한 조각을 때내어 유리를 내리고 밖으로 던졌다. 그런 시늉만으로 또렷하게 앞으로 차는 달리고 있었다. 설명할 수도 없는 그렇다고 인정할 수도 없는 이 기이한 경험을 남편이 선택한 목적지 안에 들어있었던 것일까.다시 안개가 짙어지고 있었다. 남편은 못 근처라서 그렇다고 했지만 이렇게 가는 것이 맞는지 의문스러웠다. 그제야 남편에게 물었다. 지금 어디로 가고 있죠?그냥 한 번도 가지 않은 길을 당신과 함께라면 갈 수 있다는 생각에 여기를 택했습니다. 남편은 안개 속을 뚫고 갈 기세로 윈도우브로시를 가동하기 시작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