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국의 간성을 지킬 장수로서/ 표류해서 새 지저귀는 것 같은 곳에 머무르니/붉은 마음은 백일에 비쳤고/충의는 밝은 가을과 같이 늠름한데/몸은 남황에서 울고 있으나/혼은 북궐을 찾아 헤메도다./이몸이 비록 일만번 죽더라도/어찌불공대천의 원수를 참겠는가?영천 동린각에 봉향된 김완장군이 임란시 포로가 되어 지은 시다.김완(金浣1546~1607)장군의 본관은 경주, 자는 언수, 호는 사성당으로, 18세(世) 김을초(金乙軺)를 파조로 하는 규정공파(糾正公派)의 후손이며, 김을초의 장남 김자양은 영천의 입향조로 김완의 5대조이다. 김응생선생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퇴계이황의 문인으로 영천 유림의 리더였던 아버지의 가학으로 학문에 독실했다. 그는 또한 창대 정대임선생의 외숙이기도 하다. 부인은 밀양 손씨로 손억의 딸이며,슬하에 3남을 두었는데 절충장군 중추부사 김계남과 김우남· 김응남이다.1577년 선조 정축년에 무과에 급제해 그 당시 엘리트들만 임명되는 임금 친위부대인 선전관출신으로 1589년 사도첨사가 되어 전라좌수영에 배치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 해전과 당포 해전에서 우척후장, 한산도 대첩과 부산포 해전에서는 척후장으로 활약하였다. 7년간의 전쟁 중 이순신 장군을 도와 무려 300여 척의 적함을 수장시킨 맹장 으로 크게 전공을 세운 공로로 정3품 당상관 절충장군으로 제수되었고, 단순히 왜선을 격파한 것이아닌 왜군 대선으로 올라가 왜장과 일대일 결투를 벌여서, 그 왜장을 베어버리고 대선을 통채로 노획한 용감 무쌍한 맹장으로 최고의 명장 이순신장군에게 인정을 받았다. 또한 1595년(선조28)에 거제도민(巨濟島民)으로 하여금 농사에 힘쓰게 하고 소금을 많이 생산케 하여 소금과 군량미로 비축한 미숫가루가 500석에 이르렀고, 부서진 전선을 수리하는 데 앞장서 그 공을 이순신장군이 장계를 올려 한산도 조방장으로 승진되었다. 그 후 정유재란이 발발하기 전 이순신장군이 어명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서울로 압송된 뒤에는 원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서 수군을 지휘했는데 원할한 통솔이 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육군 장수출신이었던 원균은 수군을 통솔하기에 무리였고, 완전 고립무원에 빠져버렸다. 이로 인해 부하장수들이 따르질 않으니 술에 빠져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원균은 도원수 권율에게 곤장을 맞고 억지로 출진하였지만, 조선수군은 1597년 7월16일 거제 칠천량해전에서 일본수군의 기습공격을 당하여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때 충청수군절도사 최호와 전라우도수군절도사 이억기, 사도진첨절제사 김완장군이 끝까지 항전하면서 힘껏 싸우다 김완장군은 왼쪽다리에 총을 맞아 바다로 뛰어내렸으나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혀 일본으로 압송되었다. 일본에 이르러 시를 지어 맹세코 죽어도 굴복하지 않은 절의의 뜻을 보였고, 마침 지진이 발생하여 혼란한 상황에서 탈출에 성공하여 바다를 건너 구사일생으로 양산에 도착하였다.전쟁에서 전사한 것으로 알려진 김완장군이 포로로 잡혀갔다가 탈출하여 돌아온 경위와 왜국 및 부산과 동래지역의 적의 형세를 기록하여 왕에게 장계를 올리니, 선조 임금은 크게 감탄하여 김완 장군이 지조를 굽히지 않고 적국에서 탈출한 사실을 중국 한대 (漢代) 흉노에게 잡혀 19년간 적진에서 갖은 회유와 협박에 응하지 않고 끝내 귀환한 충절의 십년지절 충신 소무(蘇武)에 비겨 “해동소무”라 쓴 어필을 하사하고 함안군수로 임명하였다. 그후 해전과 포로생활, 탈출 과정에서 겪은 여독으로 인해 고향으로 돌아와 62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1606년 선무원종1등공신으로 녹훈되고, 저서로는 ‘해소실기 海蘇實記’가 있다. 임란 전쟁동안 생사를 같이하고 위국충절하신 충무공 이순신장군과 김완장군의 영정을 동린각에 나란히 모시고 있음을 볼 때 김완장군의 역사적 위상을 알수 있으며, 박정희 대통령이 쓴 ‘동린각’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방위가 위협받고 대내외사정이 위급한 상황에서 두 분의 고귀한 충절정신이 더욱 그리워진다. 군인들은 물론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어 수많은 이들의 발길이 끝없이 머무는 곳으로 영원히 남아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