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혼돈의 시기인 연산군때, 어느날 연산군이 흥청에서 기생과 놀기 위해 용봉장막을 가져오게 하는데 이를 관리하는 박한주 선생은 단호하게 거절하고, 연산군은 박한주를 잡아 오게 한다. 임금에게 불려온 그에게 “왜 용봉장막을 내어주지 않느냐?” 묻자 “나라에 잔치와 능침에 제사지내는 때에 사용하는 것을 주상께서는 종묘사직과 능침에는 한번도 제사지내지 않으시고 놀이와 잔치는 밤을 낮 삼아 계속하시는데 효도하는 도리에 합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반문하자, 연산군이 변명하여 “눈병이 있어서 다닐 수 없기 때문이오.”하니 “후원에서 말달리기와 제기차기는 잘 하시는데 어찌 눈병이 걸렸다고 말씀하십니까?” 이때 연산군이 화를내며 “용봉장막이 네 물건이냐?” 묻자 “용봉장막이 제 것은 아니옵니다. 하지만 주상의 것도 아닙니다.” “어째 그런가?” “이는 모두 백성의 세금에서 나온 것이니 백성의 장막이라 해야 옳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임금의 사사로운 물건이겠습니까?” 박한주선생이 정 5품인 사간원 헌납으로 있으면서 한 치의 물러섬이 없이 임금인 연산군에게 목숨걸고 왕을 꾸짖어 연회를 신랄하게 비판한 일화이다.박한주(朴漢柱 : 1459~1504) 선생은 경북 청도군 풍각면 차산리에서 출생하셨다. 본관은 밀양. 자는 천지, 호는 오졸재( 拙齋). 고조부는 행산 박세균이며, 조부는 박대성으로 밀양에서 청도로 이거했다. 부친은 통사랑 박돈인이다. 일찍이 고극경선생에게 수학하여 6,7세에 시문에 능하였고, 성리학의 도, 불서와 중국의 고전시가인 『초사』읽기를 좋아하고 글을 잘 썼던 선생은 성리학에 전념하여, 경전의 깊은 뜻을 탐구하고 천문과 지리, 작은 기예와 기타 기술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였다. 성장할 무렵 김굉필과 함께 김종직선생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1485년 별시 문과에 급제해 여러 요직을 거쳤다.성종 22년 사간원 정언으로 김종직이 주도하는 사림세력의 정치풍토를 쇄신하고 사회의 기강을 바로 세우는데 힘을 쏟았다. 부모의 봉양을 위하여 자원해서 창녕현감으로 나왔다. 이때 백성들을 지성으로 보살피고 교화시켜 임금이 비단과 교서로서 포상하였다. 전생서직장에 제수된 뒤 한성부참군·사헌부감찰·사간원정언·성균관전적 등을 지내고 1497년 사간원 헌납 재임 중 연산의 실정과 무상시로 이어지는 유연을 중지 할 것을 직간하자 임금이 노하여 간원에게 식물과 녹피를 하사하면서 박 모(謀)는 주지말라는 교지를 내렸을 정도로, 연산군에게는 신하로써 가시였을 것이다. 이 후 노사신, 임사홍의 간사하고 배임한 죄를 탄핵하고 연산군의 횡포가 심해지자 외직을 청해 평해군수를 거쳐 예천군수로 부임했다.신진사림과 훈구세력간의 정치투쟁인 무오사화에 김종직 선생의 문도로 분류되어 선생과 김굉필 등 문도들이 붕당을 만들어 조정을 나무라고 비방하였다는 죄목으로 연산군과 훈구파에게 미움을 받아 곤장 80대를 맞고 평안도 벽동으로 유배를 당하였다. 연산군 6년에 낙안으로 이배되었는데 그곳에서 후학들을 지도하여 최산두 등 많은 문인을 배출하여 유풍을 진작시켰다. 유희춘은 이를 두고 호남 학문의 연원이 오졸재 박한주 선생에서부터 나왔다고 하였다. 연산군 10년 왕을 중심으로 한 궁중세력과 훈구·사림으로 이루어진 세력간의 대결이자 생모 윤씨의 폐위·사사 사건을 빙자한 조정 신하간의 암투인 갑자사화에 선생도 연류되어 참형을 당하였다. 향년 46세였다.2년 뒤에 연산이 폐위되자 대대적으로 죄수를 석방하여 연좌된 자들이 모두 풀려났고, 김종직 이하 모든 사람이 복관되었다. 이후 중종반정 후 조광조 등이 주청하여 통정대부 도승지겸 예문관에 추증되었다. 밀양 예림서원, 함안의 덕암서원, 청도 각북면 차산서원, 풍각면 석강서원에 배향되었다.『 오졸재집』이 있으며 밀양에선 5현으로 추앙받고 있다. 한강 정구선생은 “나는 어릴 때부터 다행히 선배와 종유하면서 선생의 기풍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감격하여 가슴속 깊이 사모하여. 선생의 그 청렴하고 충의를 지켜 흔들리지 않은 절조에 감탄하고 분발하도록 해야겠다.” 하였다. 인문절의의 예락의 고장으로 청도에서 어떤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던 기개와 강직함으로 왕의 잘못을 직간한 박한주선생이야 말로 충신의 표본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