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중 조홍감이 고와도 보이나다/유자 아니라도 품음직도 하다마는/품어가 반길 이 없을세 글로 설워하나 이다.”
3년 시묘살이 한 효성이 지극했던 노계 박인로선생이 41세에 지은 시조인 ‘조홍시가(早紅枾歌)’로 한음 이덕형을 찾았을 때 대접하기 위해 내어놓은 붉은 감을 보고 이미 돌아가고 안 계신 어버이를 눈물겹게 그리워하며 쓴 작품으로 ‘품어가 반길이 없을새’라는 표현은 감칠맛 나는 언어 구사력을 보여준다. 영천시 북안면 도천마을로 들어서다 첫눈에 보이는 노계시비에 이 ‘조홍시가’가 새겨져 있다. 조선 중기의 무신이자 가사문학의 대가인 박인로(朴仁老1561~1642)선생의 본관은 밀양으로 자는 덕옹, 호는 노계(蘆溪)·무하옹이며, 영천에 입향한 풍천군수 박영손이 고조부이다. 부친은 승사랑승의부위 박석이며, 모친은 웅천 주씨로 주순신의 따님이며, 부인은 숙부인 덕수 이씨(德水李氏)로 슬하에 3남을 두었는데 박흥립과 장사랑 박경립· 박효립이다. 그의 생애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인생전반에는 임진왜란에 종군한 의병으로 무인으로서 삶을 살았다면, 후반에는 독서와 수행으로 초연했던 선비요 문인가객으로 안빈낙도의 삶을 지향했다. 32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백척간두에 선 조국을 구한다는 일념에서 의병장 정세아의 휘하에서 별시위가 되어 왜군과 싸웠다. 이어 수군절도사 성윤문에게 발탁되어 그 막하로 종군하였고, 왜군이 퇴각할 당시 사졸들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가사 태평사(太平詞)를 지었다. 1599년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선전관을 거쳐 거제도 조라포 수군 만호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가 세워졌다. 임란이 끝난 후에는 고향인 영천에 은거하면서 손수 농사를 지으며 후학들을 가르치면서 본격적인 문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시조를 즐겨 지으며 생활화했지만 국문학사상으로 가사문학 쪽에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한음 이덕형과는 동갑으로 교분이 두터운지라 벼슬길의 기회도 있었으나 세속의 명리에 연연하지 않고 성경충효(誠敬忠孝)를 덕목으로 삼아 실천궁행하여 사람을 대함에 공경하고 부모에 효도하며 형제간에 우애하였고 나라에 충성하는 도리를 실천했다. 노계선생의 시는 독특한 자신만의 개성을 지니고 삶의 가치를 추구하면서 생활인의 정서를 담은 현실 세계의 인간의 애환을 노래했다. 가사문학중에서도 가난한 사대부가 실제로 몸 소 농사를 지으면서 읊은 <누항사>는 임진왜란을 겪은 뒤에 회상하는 장면이라든지 아니면 농사를 지으려고 옆집에 소를 빌리려 갔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의 그 서글픔을 표현 곳에서는 눈물이울컥 치밀 정도로 딱딱한 직설적 표현이 아닌 응집된 문학적 언어를 적절히 구사하고 있다. “헌 먼덕 수기 스고 측 업슨 집신에/설피 설피 물너오니 풍채 저근 형용에/개 즈칠 뿐이로다.”
이 가사는 짚으로 만든 멍덕을 깊숙이 쓰고 축도 없는 짚신을 끌며 맥없이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니 골목의 개까지 짖어대니 그 얼마나 서글펐겠는가. 유교적 바탕위에 조국애·자연애를 사상적 바탕으로 천재적인 창작력이 발휘 된, 전쟁 중에서도 시정이 넘치는 작품을 썼으며 무인다운 기백과 신선미로서 선생만의 웅장한 시풍을 형성했다. 노년에 여헌 장현광선생과 교유하면서 포항시 죽장의 입암서원과 많은 인연을 맺었다. 지금도 입암서원 앞 개울가에는 박인로선생 시비가 세워져 있고 그곳을 가사천이라 부른다. 82세로 생을 마친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조홍시가, 선상탄, 사제곡, 누항사, 영남가, 노계가, 입암별곡 등으로 ‘노계집’에 실린 것 외에도 많이 있었지만 현재는 소실되고 남아있지 않다. 9편의 가사와 67수의 시조, 그리고 110수의 한시와 저서로「입덕문도」와 『노계집』등이 남아있다. 지수 정규양(鄭葵陽)이 찬한 행장에는 “시 또한 확 트이고 막힌데가 없어 조금도 비루한 데가 없었다.그의 문장 또한 그러했다......아! 세상에는 어찌 이 같은 사람이 다시 있겠는가? 공 전에도 공과 같은 씩씩한 무부가 없었고 공 후에도 공과 같이 독서 수행한 선비가 없었다.”노계선생문중에는 선생의 충의정신을 엿 볼수 있는 자료가 하나 전해내려 오는데 조선역대 왕과 왕비들의 기일(國忌,태조~정조)을 기록한 편액이 보존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