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조 는‘근동향(謹同鄕)’이라는 제목으로 향회를 개최하는 의식절차/제2조는 ‘천집강(薦執綱)’으로 좌 수[집강]와 별감[풍헌 ]의 자격과 선임 방식을 규정/제3조는 ‘중체통(重體統)’으로 별감이 좌수를 웃어른으로 모시는 예절/제4조는 ‘의신참(議新參)’으로 신입 회원을 심사하는 절차를 규정/제5조는 ‘돈풍속(敦風俗)’으로 회원이 상(喪)을 당했을 때 인력과 물품을 부조하는 내용/제6조는 ‘경관장(敬官長)’으로 신구(新舊) 수령의 영송(迎送)에 참석할 의무/제7조는 ‘금외인(禁外人)’으로 외인의 향소 출입을 금지한다는 내용/제8조는 ‘중민역(重民役)’/제9조는 ‘집간리(戢奸吏)’로 향리의 죄와 이를 다스리는 절차를 규정. 제10조는 ‘벌유과(罰有過)’로 몇 가지 반칙과 처벌규정으로 이 글은 임란 후 정담선생이 영천 사림의 원로로서 사회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만든 10조 및 전문과 기로 구성되어 있는 지방문화재제157호로 지정된 영천향규다.
정담(鄭湛;1552∼1634)선생의 자는 청윤(淸允), 호는 복재(復齋), 본관은 오천이다.정몽주의 8촌인 정문예의 5세손이며, 정습명의 15대손이다. 조부는 훈도정굉, 아버지 정인개는 무과에 급제하고 사헌부 감찰을 지냈고 어머니는 영천이씨로 이희(李熙)의 따님이었다. 부인은 영양 최씨로 생원 최기남의 딸이며, 슬하에 2남 3녀를 두니 아들은 정사도와 정회도이며, 사위는 최여곤과 주부 손종하, 찰방 성이직이다. 영천 도천리에서 태어나 평생을 영천에서 보냈고 영천에서 죽어서 영천에 묻혔다.선생은 어려서부터 용모와 인품이 뛰어났으며 효성이 지극했다, 일찍이 한강 정구선생과 지산 조호익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으며 1585년(선조18)에 식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으나 일생을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학문 연구에만 힘썼다. 조정에 천거되어 주부의 제수가 내렸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충절을 다짐하며 임란창의 의진에 나아가서 권응수장군과 족형인 정세아, 정대임 등과 더불어 왜구를 섬멸하고 영천성 회복에 큰공을 세웠다. 그 공로로 승훈랑에 올라서 선무원종공신으로 내사직의 직첩과 의금부도사의 제수가 내렸으나 모두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영천성수복에 대한 전말을 기록한「 영천복성일기(永川復城日記)」가 그의 『복재실기(復齋實記))』에 전하고 있다. 이후 고향인 도천에서 도천서재를 세워 극복당이라 이름하고 제자를 모아 도덕과 의리를 가르치며 후학양성에 전력하고 소실된 영천향교 대성전 중건하고, 임고서원 흥문당 신축, 이순몽장군 사당을 건립하고, 조호익선생의 도잠서원을 지산의 문인들과 함께 건립하여 초대원장(1617~1626년)을 10년간 역임했다. 이때는 임진왜란이 끝난지 불과 십여년으로 전쟁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때로 전란이 가져온 사회적 혼란은 기존질서를 크게 위협하고 있었을 때였다. 국가와 양반들의 권위는 실추되고 백성들은 동요하였다. 이에 재지사족들은 향규와 향약과 가례같은 유교적 규범과 제도를 철저히 시행하여 기강을 바로잡아 기존의 질서를 다시 확립하려는 의도를 집약하는 시대적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양반의 입장과 이해관계를 반영한 것으로 그야말로 양반을 위한, 양반의 규범이었다 하겠다. 이 「영천향사당입규」는 향회의 규약 즉 회칙이다. 조선시대 향촌사회에서의 ‘향안’의권위는 절대적이었다. 여기에 입록될 수 있는 계층은 세족, 현족이라 불리우는 재지사족들이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초기 향촌사회의 지배권은 이들에 의해 장악되었다. 그들은 ‘유향소’라는 자치기구를 조직하고 향회를 통하여 모든 문제를 해결해 나갔으며 ‘향안’에 입록할 수 있는 자격과 절차를 엄격히 통제함으로써 중앙권력에 대항할 수 있는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해 나갔다. 수많은 행적과 후학을 키우면서 보낸 80여년간 충효명절의 행적을 남긴 복재선생이 제향된 도천리 도봉서원은 훼철되고 복원되지 않은채 현재 1987년 관내 유림과 문중에서 세운 징사복재정 선생기적비가 외로이 서있다. 서원의 복원이 이루어지길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