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도 저런데 사람이 어찌 짐승만 못 해야 되겠습니까? ”조경온 선생이 5살때 새끼 까마귀가 어미 까마귀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는 모습을 보고 아버지에게 한 말이다.신라 고려를 거쳐온 명문가로 조선 초에 고려의 옛 신하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명분을 내세워 영천으로 낙향한 조신충의 5형제 중 맏아들인 조상보의 후손인 조경온(曺景溫1548-1592)선생의 본관은 창녕. 자는 여율, 호는 임계(林溪)로 부친은 정릉참봉 조희장이며, 모친은 의인 부평 유씨로 장령 유세춘의 딸이다. 부인은 정부인 월성 최씨로 부사직 최삼고의 따님으로 슬하에 6남을 두니 군자감봉사 조축, 통정랑 조의, 가선대부 동지의금부사 조항, 조방, 함평훈도 조황, 조확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한 그는 32세에 부친이 돌아가셔서 슬픔에 잠겼으나 장지를 구하지 못해 애태우는 중에 소문을 듣고 어떤 도인이 찾아와 “하늘이 낳은 효자”를 위해 묘지를 정해 준다하여 지금의 화산면 귀호동 속칭 “어둡이”이다. 선생은 손수 삽을 잡고 “아버지의 살갗에 닿는 흙인데 어찌 남에게 맡기겠느냐?”며 손수 채로 쳐서 깨끗하고 보드라운 흙을 골라 장례를 마치고 낮에는 종일토록 아버지의 은덕을 기리며 묘소를 지켰으며, 밤에는 빈소를 떠나지 않고 3년간 여묘살이를 하였다. 또한 병환으로 누운 어머니마저 애석하게도 돌아가시자 지극 정성으로 장례를 치르고 또 다시 3년간 여묘를 살았다. 상복을 벗은 후에도 여막을 재실로 고쳐 영모재라 편액을 하고 그곳에서 거처 하면서『 소학훈의』라는 책을 지어 자손들이 성묘 한 뒤 틈틈이 익히게 하여 가계의 본분으로 삼고 효제지심(孝悌之心)을 길러주려고 했다. 효제지심이 길러진다면 그것은 나의 뜻이요, 또한 묘소를 보호하는 길이라고 영모재 기문에 명시되어 있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 잔악한 왜적에 의해 전국토가 초토화 되고 왜군은 노략질을 일삼고 보물을 찾는다며 조상 숭배를 위해 만든 분묘를 닥치는 대로 파헤쳐 발굴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다닌다는 소문에 부모 및 조상의 묘가 걱정되어 자신은 재사(齋舍)에 남아 묘를 수호하였다. 충과 효를 중요시 하는 선비에게 조상의 묘를 지키지 못한다는 것은 씻을 수 없는 치욕이다. 이에 조경온은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내 어찌 적의 무리를 겁내어 부모의 산소를 그냥 두고 피난을 가겠느냐. 평생에 못 다한 효도를 하겠노라”며 묘소 앞을 떠나지 않았다. 이때 우리 강토를 스스로 지키기 위해 많은 의병들이 일어나 왜군과 전투를 시작하였는데, 조경온과 사돈 사이인 권응수장군이 찾아와 “충신은 효자의 가문에서 나온다고 하니 함께 왜군과 싸웁시다”라고 수차례 권하였다. 하지만 선생은 부모의 산소를 지키기 위해 전장에 나가지 못함을 이해하여 달라고 얘기하고, 세 번이나 의병들이 왜적을 대항 해 싸울 계책을 편지로만 전달하고, 장자 조축을 의병으로 권응수 휘하에 출전시켰다. 어느 날 낮에 왜군들이 산소 앞에 들이닥쳤다. 왜군들이 고함을 지르며 창칼로 위협했으나 무덤 앞에서 조금도 동요되지 않고 늠름한 모습을 유지하자, 왜군들도 탄복을 하며 돌아갔다. 이후 왜적들이 다시 찾아와 위협을 하며 칼로 목을 찔러서 유혈이 낭자한데도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이를 본 다른 왜군들은 “어찌하여 만고의 효자를 해치느냐?”며 꾸짖고는 근처에 있던 절의 스님에게 부탁하고 떠났다. 하지만 “왜적의 난입 때 전쟁터에 나가지 못한 것이 한이 되지만, 선묘(先墓) 앞에서 죽는 것도 영광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45세에 생을 마감했다. 영천성 복성에 성공한 권응수 의병장은 이 소식을 듣고 달려와 통곡하기를 “살아서는 효행을 다하고, 죽어 또한 나라 위해 목숨을 잃었구려” 하면서 슬퍼하였다.공조참의로 증직되었다가 뒤에 다시 이조참판겸동지의금부오위도총부부총관으로 추중되었으며, 사돈 권응수장군과 같이 구천서원에 배향하였으나 순조(1832년)때 유림에서 문·무가 다르다하여 귀호리 회계서원에서 봉향하고 있다. 또한 후손들이 삼창리 ‘붕어덤’ 언덕 위에 임계정을 지어 추모하니/ “숲에는 맑은 바람, 냇가에는 밝은 달 여름 낮은 길고, 가을 밤은 고요한데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을 맞으니 그윽하고 흥겨움이 이로써 족하도다 “ 선생의 만흥시의 한 구절로 효와 충절로 부끄럼 없는 생애를 보낸 선생이 임계정 정자위에서 내려다 보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