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넘어 천리계신 왕이 어찌 아시리요(雲山千里聖何知)/ 북쪽을 바라보며 잠못 이뤄 아픈 가 슴( 北望胸懷獨夜遲)/구국 향해 맹세한 의병장의 큰 뜻은(餉士東爲成一誓)/죽는다 하더라도 어찌 목숨 아끼리요”(生輕義重死前期)/ 이 시는 전삼달 장군이 1593년 경주 안강 전투에 의병으로 참전했을 때 지은 ‘숙안강현음음시(宿安康縣吟飮詩)로 23살의 젊은 의병장이 죽음으로서 보국하겠다는 의로운 충정이 응집되어 표출된 시다.전삼달은 용궁(축산)전씨로 축산군 전원발(全元發)의 후손으로, 영천 입향조는 용궁 전씨 10세인 봉상시직장전영창이다. 고조부는 전적과 감찰을 역임한 전회옥이며, 증조부는 참봉 전언, 조부는 전희상, 부친은 첨지 중추부사 전몽룡이다. 모친은 정부인 함양 박씨로 도사 박등의 따님이다.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들이 영천까지 밀어 닥치자 부친 전몽룡은 아들 5형제를 불러 모아 전장에 나가 왜적을 섬멸하는데 온힘을 다 하라고 명하였다. 5형제는 구국의 충정으로 함께 의병을 규합하여 사천전투와 영천복성전투, 경주전투에 참가해 큰공을 세웠다. 이로 인해 첫째아들 전삼락은 선무원종 2등공신과 예조좌랑, 둘째아들 전삼익은 선무원종 3등공신과 봉화 현감에 올랐으며. 셋째아들 전삼달은 선무원종 3등공신에, 넷째아들 전삼성은 통덕랑으로 녹훈과 벼슬을 사양하고 귀향하였다. 다섯째아들 전삼득은 훈련원첨정이다. 이들 전삼락, 전삼익, 전삼성은 지산 조호익의 문하에 출입하며 학문을 익혔으며, 전삼성은 지산의 수제자로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 였다.첫째아들 전삼락(全三樂)의 호는 정와이며 문과에 급제하고 예조좌랑 임란에 창의하여 적을 토벌하고 원종공신으로 녹훈되어 공조참의에 추증되었다. 둘째아들 전삼익(全三益)은 임진왜란 때 동생 전삼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킨 괴암 박봉상 휘하로 들어갔다. 임란에 문묘(文廟)에 배향되어 있던 공자를 위시한 성인 다섯명의 위패를 왜적들에게 화를 입지 않도록 지켜내었다. 이러한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첨정에 제수되었으며 원종공신의 품계를 받고, 봉화현감에 제수되었다. 청렴함과 공명정대하게 고을을 다스린 공로로 백성들이 선정비를 세워주었다. 셋째아들 전삼달(三達1570~1633)은 자는 군형, 호는영고정(潁皐亭)으로 의병으로 참전해 싸웠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30세가 된 1599년 비로소 과거에 응시하여 무과에 급제하고 창원별장이 되어 마음을 다해 방비하고 적을 막아 임금께서 글을 주어 포장(褒奬)하였다. 경상 좌수사, 황해도 병마사 등을 역임했다. 지략과 무예를 겸비한 그에게 인조대왕이 신임하여 오만불손한 청나라를 응징하기 위한 계획으로 어서를 남겼으나 불행히도 큰 뜻을 이루지 못하고 역사의 유물로 남아 어서각에 전한다. 넷째아들 전삼성(全三省1572~1641)선생의 호는 서강(西岡). 임진왜란때 창의하여 크게 공을 세웠으며 박학다식한 학자로서 당세에 이름을 떨쳐 가문을 빛냈다. 그는 일찍이 지산 조호익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충효에 기초해 어떤 일에도 부모님의 의사에 절대 순종하며 지성으로 봉양했으며, 부모가 돌아가신 후 삼년 시묘살이를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하여 적을 토벌하고는 공을 사양하였으며, 임란 후 집안 모든 노비를 방면하고 학문을 탐구하는데 매진하고 마을에 대곡서당을 세워 후진양성에 힘썼다. 벼슬은 통덕랑으로 석판본의 『서강선생문집』이 있다. 선생의 충의와 효행 그리고 노예를 해방하신 인애의 정신은 길이 민족대대의 본보기로 존경받을만 하다. 임란에 전몽룡의 아들 5형제가 의병으로 큰 공을 세우고 전쟁이 끝난 후 동구곡당 대추나무 밑에서 개선문회를 개최 한것이 계기가 되어 용궁 전씨 문중의 다섯사람이 대추 나무를 깍아 오인정 이란 글을 새겼고, 이로인해 대추골이라 전해진다. 오인정과 봉화현감 전삼익의 강학처인 조곡정, 전삼성이 학문을 닦던 대곡서당이 남아 그의 실천적인 교육에 힘쓰되 특히 효재 충신이 부족하고는 세상에 설수 없다는 훈계속에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나라를 위해 구국의 충정을 바쳤던 용궁전씨 5형제의 조상에 대한 효와 나라의 어려움에 분연히 일어난 구국충절이 후세인들에게 널리 알려져 박인로 선생의 말처럼 역사에 빛나는 이름으로 영원히 전해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