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당시 영천성 복성에 큰 공을 세운 호수 정세아 선생과 그의 아들 백암 정의번 공의 충절을기리고 후학양성을 하던 ‘환구세덕사’가 도내 10개서원의 추인을 받아 ‘서원’으로 승원했다. 환구세덕사의 서원 승격 고유제 및 준공식이 18일 임고면 환구길 142-1(선원리) 현지에서 개최됐다. 이날 행사중 전민욱 향토사학자가 발표한 ‘환구서원 제향인물과 임진왜란’이라는 주제발표문을 요약 발췌, 소개한다.) 환구서원은 본래 환고세덕사라 하여 임진왜란 당시 선비의 몸으로 의병을 일으켜 구국의 선봉에 서신 호수공 휘 세아, 그리고 아드님이신 백암공 휘 의번 두 분의 조두지소(제사를 지내는 곳)로 세워졌다.호수공은 고려조 17대 왕 예종과 더불어 인종, 그리고 의종까지 세 임금을 섬기면서 기개가 높았던 명신으로, 의종조에 곧은 도리로써 간하다가 참소를 당한 추밀원지주사 형양공 휘 습명을 시조로 하는, 명문가인 영일 정씨의 후예이다.영천 출신으로 동방이학의 조종으로 추앙받고 계신 포은 선생의 증조부 형제분께서 처음 영천으로 전거했으며, 종조부이신 휘 광후께서는 공조판서를 지내셨다.호수공의 부친은 휘 윤량이시니 창릉참봉을 지내셨으며, 일찍이 효행으로 향중에 이름이 드러나셨고, 퇴계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실 때 학행으로 칭찬이 있었으며, 함께 수학한 명산 김응생 공, 소암 노수 공 등과 더불어 향리에 자양서당을 세워 후진 양성에 힘씀은 물론 이 고장에서 탄생하신 포은 선생을 위한 임고서원 창건에 앞장섰다.호수공은 서기 1535년 자양 노항촌에서 태어나시어 어려서부터 아주 뛰어난 기질이 있으셨으며, 성장하여서는 단정하고 근엄하여 동작에 법도가 있어서 일찍이 기뻐하고 노여워함이 말이나 표정에 드러나지 않아 향리에서 후덕한 군자라 칭송이 자자했다.호 수공은 문장이 뛰어났으며, 특히 시를 잘 하시어 당대 선비들 가운데 명성이 높더니, 24세에 진사에 급제했다.서기 1568년에 어머니께서 돌아가심에 슬퍼하심은 극심하셨으나, 모든 상례를 가례에 의해 엄격하게 진행했다.아 버지께서 만년에 친구를 좋 아하시어 항상 손님이 집에 가득하였으나, 공께서는 있고 없음을 가리지 않고 접빈의 예를 다 하였다.아 버지께서 돌 아가시자 드디어 진취할 뜻을 버리시고 항상 고요히 사시면서 경서와 사서만을 열심히 읽으시며 마음속에 익히셨으며, 날마다 시와 예로써 자제들을 가르침에 엄하게 과정을 세우시고, 마을의 용계서사를 보수하시어 인근 자제들을 모아 글을 익히고 학업을 닦게 해서, 순순히 이끌어 주는 데 게을리 않고 수 십 년 동안을 한결같이 행하시니, 자양 일대에는 글 읽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그러나 불행하게도 임진년 풍신수길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4월 13일 왜선이 바다를 덮쳐 와서 곧장 동래로 침공하니, 중과부적이라 속수무책으로 동래와 울산, 경주가 연속해 함락되고, 4월 23일에는 영천마저 함락되었으며, 이어 열읍이 연이어 함락되고 한양의 궁성마저 위협을 받자 임금께서는 서북으로 파천하기에 이르는 등 국토와 백성들이 유린되기에 이르게 되었다.이에 공께서 분연히 일어나 눈물을 흘리며 이르시기를, “평상시에는 선비가 진실로 자중하여야 하거니와 이제 나라에 대란이 일어났고, 임금께서 몽진 길에 오르셨으니, 초야에 있는 자가 어찌 편안할수 있겠느냐?”하시고, 또 이어 “강약이서로 당할 수 없으면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하시고, 아들들과 조카들로 하여금 항오를 갖추게 하시고 이내 격문을 지어 향병을 모집하시었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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