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한 남자가 내안으로 들어왔다. 바다를 항해하던 엔진을 끄고 항구에 정박하여 닻을 내리고 싶다. 나를 거쳐 갔던 남자들의 흔적을 지우고 한 사람을 위한 등불을 준비하리라.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이끌고 저 멀리 보이는 등불을 찾아올 수 밖에 없는 발원지로 가꾸리라. 여섯 살의 나이 차이는 살다보면 메워지겠지. 여섯 살 많은 내가 생각했다.남편의 숨소리를 들었다. 때로 가쁘게 때로 느리게 숨소리는 전달되어왔다. 잔잔하고 평온한 방안의 어둠은 이불속과 친해져라 유혹하고 있었다. 교미 중에 수사마귀는 암사마귀에게 자신의 머리를 맡긴 후 복종의 자세를 취하는 영상을 본적이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머리를 뜯어 먹은 암사마귀가 교미를 끝내자 수사마귀의 몰골은 처참했다. 암사마귀에게 종족번식을 위해 전부를 허락하는 수사마귀의 일생이 가련하고 서글펐다. 그에 비해 인간은 얼마나 행복한가. 혼자서 혼곤한 잠속에 빠진 수컷의 등을 보며 웃음이 입가에 머물렀다.남편의 등을 똑똑 노크했다. 갈래요? 남편이 돌아누웠다. 나는 일어나서 하나하나 벗어 둔 옷을 순서대로 입기 시작했다. 남편은 내가 옷을 다 입을 때까지 침대위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옷 입는 여자를 처음 보는 눈으로.하루 분량의 시간이 삼분에 일정도 남았어요. 스타킹마저 신은 내가 남편의 반쯤 떠진 눈을 보며 얘기했다. 남편의 눈이 다 떠졌다. 그렇게 시간을 얘기하는 사람은 처음이에요. 남편이 호들갑스럽게 웃었다. 모텔 밖으로 나왔을 때 해가 서산으로 기울고 있었다. 몇 마리의 새가 기우는 서산으로 날아갔다. 약간 한기를 느낀나는 팔짱을 했다. 남편이 기분좋게 자신의 팔을 내어주었다. 주차장에 많이 파 킹 되 어 있 던차들이, 빠져나간 빈자리가 많아져 있었다. 남편은 휘파람을 불며 운전대를 잡았다. 정복자의 당당함이 휘파람 속에 묻어나왔다. 나는 그 기분을 누리라며 한결 고분해 졌다. 자신의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는 영토를 인정해주었다.청송을 벗어나 영천으로 돌아오는 길에, 갈 때 그 길이었지만 좀비도 탑차도 안개도 없었다. 무인 가판대에 올려 진 사과와 도로와 철도가 만나는 교차점은 있었다. 땅거미는 지고 가로등은 켜지고 생각지도 않은 보름달이 하늘 저쪽에 두둥실 떠 있었다. 칡넝쿨 우거진 도로를 따라 차가 속도를 내자 불빛을 받은 나무들이 거수경례를 하는듯했다. 백일홍 화단이 도로가에 예쁘게 조성되어 있었다. 그들도 불빛 속에서 수줍게 자신을 드러내었다. 풍경은 내 마음가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남편이 든든하다고 느끼면서 곁 눈짓으로 쳐다봤다.그다지 화려하거나 거창하게 만나진 않았지만 앞으로 같은 시간 안에서 함께 할 시간이 많아질 거란 예감으로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오늘 하루 어땠어요? 남편은 앞을 보며 툭 던지듯 내 기분의 상황을 물었다.이럴 때 좋았다고 대답해야 하죠? 대답대신 질문으로 응수를 했다. 남편은 정색을 하며 제 질문에 솔직한 대답을 듣고 싶은데요. 그 말에는 함께 할 시간에 대한 해답을 찾고 있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