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는 평화가 오래 계속 되었던 까닭에 백성이 적군을 보지 못하다가 졸지에 적을 만나게 되니 모두 겁에질려 처자식을 이끌고 새나 짐승처럼 산 속으로 숨었다가 격문을 듣고 감격하여 원근을 막론하고 점점 향응하여 향인 조희익과 조덕기, 조성, 이번, 정천리, 류몽서 등과 훗날 무인이며 가사문학가로 이름을 떨친 노계 박인로 등 문무인은 물론 가노들 중 건장한 자까지 모여든 무리가 구백 인에 이르렀습니다.이에 모여든 군중들은 법연 위에ek 단을 설치하고 호수공을 의병장에 추대하고 최벽남을 중위장으로 삼아 의병의 기치를 휘날리게 되니 때는 바야흐로 5월 초였습니다.호수공께서는 제장들로 하여금 곳곳에 복병을 설치케 하였는데, 5월 15일 봉고어사라 지칭하는 일단의 무리들이 군위로부터 내려오고 있다는 보고를 듣고 호수공께서는 “ 이는 반드시 거짓이다.”라고 하시며, 족제 정대임과 신녕 의병장 권응수 등과 더불어 지금의 화산면 석촌 박연에서 적을 맞이하여 거의 다 베어버리고, 그들이 가진 병장기와 식량, 문서들을 모두 노획하니 이로부터 의병의 사기가 크게 진작되었습니다.6월 초에 학봉 김성일 선생께서 보내오신 초유문을 읽으시고는 학봉 선생에게 편지로서 당시 상황을 보고하기를, “강좌의 모든 수장들이 당초에 도망쳤다가 이제 머리를 들고 나타나 의병들을 저해하고 억제하며, 의병을 임의대로 호령하여 관군에 편입시킴으로 의병들이 모두 흩어져 수습 할 수 없음은 물론, 좌도지방에서 명령을 받을 곳과 지휘를 청할 곳이 없습니다.”라고 상세히 올리니, 학봉 선생이 대단히 기뻐하며 위로하여 말씀하시길, “제군들이 늑대와 범의 굴을 무릅쓰고 건너오고 가시밭의 지역을 드나들면서 멀리 와서 서로 물으니 진실로 충의의 지극함이 아니면 어찌 능히 이와 같이 나로 하여금 감격할 수가 있겠는가?”라고 하셨다는 기록이, 학봉 선생의 언행록과 송암 이로공의 용사일기에 상세히 나타나 있습니다.또한 의성, 의흥, 안동, 예안 등에서 각각 의병 모집을 결의하고 향병을 일으켰으나 그 세력이 대단히 외롭고 약하기 때문에 공과 더불어 회합을 요청하므로 호수공께서 나누어 복병을 설치하고 형세를 살펴 서로 원조할 뜻을 약속하셨습니다.이때 적이 영천성에 주둔해 웅거하면서 밤이면 성문을 굳게 닫고 지키며 낮에는 사방으로 나가 노략질을 일삼으며 백성들을 괴롭게 함에 호수공께서 족제 정대임 등 모든 의사들과 적을 섬멸하고 성을 되찾기를 의논하고, 신녕 의병장 권응수 등 인근 의병장과 영천군수 김윤국, 신녕현감 한척, 하양현감 조윤신 등 인근 고을 수령들에게 통고하여 의병연합군을 만드니 이름하여 창의정용군이라 하였습니다.7월 26일 영천성을 점거하고 있는 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하니 화살과 돌이 고슴도치 같이 날아옴에도 크게 함성을 지르며 육박전으로 나가니 적들이 놀라 성안으로 피신하였습니다.밤이 새기를 기다려 다시 진격하니 적은 성중에 내성을 쌓고서 죽기를 각오로 방어함에 창의정용군은 용감무쌍하게 사면에서 한꺼번에 진격하고 품세를 따라서 불을 놓아 드디어 성을 함락시키니, 궁지에 몰려 갈 곳을 몰라 하던 적들은 명원루 앞 물에 빠져 죽거나 저희끼리 찔러 죽여 살아남은 자가 없었습니다.이 영천성 복성이 바로 임진왜란 당시 적에 빼앗긴 성을 되찾은 최초의 쾌거였습니다. 이에 혹자가 이르기를, “국가의 공을 세움에 한 사람의 적을 베어도 상을 논하게 되고 성을 회복시킨 자는 벼슬을 얻게 되는데 이번 영천성 복성의 계책은 호수 선생으로 부터 나온 것인데 어찌하여 포상과 공로를 버리시고 취하지 아니하여 저버리는 것 같이 하십니까?”하니 호수공께서 정색하여 말씀하시기를, “임금이 욕되면 신하는 죽는 것이 직분이다. 당초에 내가 의병을 일으킴은 국가가 위급함에 따랐을 뿐이지 공명을 생각했던 바가 아니다. 다행히 하늘의 신령한 힘을 입어 한 번 거사함에 온전히 보장할 수 있었으면 족한 것이지 그외에 무엇을 바라겠는가.”하시니 듣는자 모두가 감복하게 되었습니다.8월 7일에 현 경산시 자인의 적을 공격하였으며, 동월 19일에는 병사 박진과 권응수, 정대임과 더불어 경주성에 숨어 있는 적을 토벌하기를 꾀하고 행군을 시작하여, 21일 도착하자마자 경주성의 적과 대접전이 벌어졌습니다.제장들이 적의 형세가 성한 것을 두려워하여 나서기를 주저함에, 호수공께서 몸소 선봉장이 되어 서문으로 달려가 육박전을 펼치니, 적들이 문을 열고 벌떼처럼 쳐들어오는지라, 우리군사 또한 북을 치며 소리 지르며 혈전에 나서니, 적의 시신은 헤아릴 수 없었으며, 계속하여 진격하니 적들이 동문으로 도망쳐 흩어졌습니다.정오 무렵 적들이 다시 대항해 오니, 성안이 모두 두려워하여 마침내 서문으로 나가는데, 적이 북문으로 따라 기병을 내어 뒤로 엄습하고, 또 문밖에 있던 복병이 와서 포위하여 포를 쏘기를 비 오듯 하였습니다.이때 우리 군은 분전하였으나, 서천 물가에 이르러 공의 장자 백암공과 생원 최인제 등 영천의병 수 십 인이 모두 여기에서 전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때 호수공께서 적진에 들어 가려고 함에, 혹은 들어가지 말라고 권고하거늘, 공께서 분연히 먼저 깊이 들어가시다가 백암공과 서로 헤어졌는데, 백암공께서 적과 마주해 싸우면서, 부자분이 서로 구원하고 보전하면서 많은 적을 사살하셨습니다.이때 호수공은 홀로 적 가운데 떨어져 있으면서 적과 더불어 힘껏 싸우시니, 백 암공이 용 기를 내 어 적 의포위를 무너뜨리고 진격하여 적이 혼란해진 틈을 타서, 호수공께서 무사하게 빠져나오게 되었습니다.백암공께서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분전하시다, 몸에 수십 군데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시며, 좌충우돌하면서 아버지를 찾아 세 번이나 적진을 드나드시다 전사를 하셨습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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