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야(下野)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시골로 내려간다는 뜻으로, 관직이나 정계에서 물러나 평민으로 돌아감을 이르는 말’이라고 적혀 있다. 평민으로 돌아간다고 한 것은 왕조시대의 잔재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하야’라는 말을 들을 때면 으레 4·19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성명이 떠오른다. 그날은 1960년 4월 26일 화요일이었고, 당시 대학 신입생이던 나는 서대문 적십자병원 옆, 쑥대밭이 되고 있던 이기붕씨 집 길 건너편 전파상에서 틀어놓은 이승만 대통령의 육성 방송을 듣고 있었다. “나 이승만은 국회의 결의를 존중하여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평국민’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나중에 남은 기록을 봤을 때는 그냥 ‘국민’으로 돼 있었지만, 그날 그 시각 라디오에서 들은 바로는 ‘평국민’이 분명하다.꼭 56년 전 그해 3월 15일에 제4대 대통령과 제5대 부통령선거가 동시에 전국에서 실시됐다. 그보다 4년 전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구호로 정권교체 운동에 나섰다가 선거일(5·15) 열흘 전 대통령후보(신익희)를 심장마비로 잃고 부통령(장면)만 당선시킨 민주당은 1960년 선거에서 또 다시 선거일 한 달 전에 대통령 후보(조병옥)를 위암 수술대에서 잃어야 했다. 초대, 2대를 거쳐 제3대 대통령에 재임중인 이승만 박사의 당선이 확실시된 상황이었음에도, 고령인 대통령에게 특별한 사정이나 사고가 생기면[有故] 헌법상 승계권을 가진 부통령 자리를 차지해야겠다는 욕심으로 집권 자유당은 부통령 후보 이기붕 국회의장을 꼭 당선시키기 위해 3·15정부통령 선거를 부정으로 물들이고 말았다. 그 무렵 종로2가 YMCA 쪽에는 맞춤양복점이 즐비해 있었는데, 나는 그날 후원자의 배려로 그곳에서 양복을 맞추기도 했다. 부정선거에 맞선 민심의 소용돌이는 대낮부터 심상치 않았고, 마산에서 제1차 데모로 수많은 학생이 부상을 당하는 한편 몇몇 학생들의 행방이 묘연해진 가운데 4월 11일 한 낚시꾼이 해변에 앉아 고기를 낚아내다가 깜짝 놀랐다. 시체 하나가 그의 눈앞에 떠오른 것이었다. 마산은 발칵 뒤집어졌다. 그것은 3월 15일 1차 데모에서 실종됐던 마산상고 김주열 학생의 시신이었고, 이로써 “학살 경관을 처단하라!” “이승만 정권은 물러가라!”는 분노의 함성이 전국에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4월 18일 고대생 데모와 학생들의 테러사건이 종로4가 천일백화점 앞 로터리에서 자행된 데 이어 마침내 다음날 아침 4·19가 들이닥친 것이었다. 삽시간에 온 장안을 학생물결로 뒤덮었고, 경무대 (현 청와대)로 달려가던 일부 학생들은 해무청 앞에서 경찰관의 강한 저지를 받았다. 최루탄이 터져 눈을 뜰 수 없었다.그러나 쓰린 눈을 부릅뜨며 돌로써, 혹은 몸뚱이로 바리케이드를 부수었다. 경무대 앞 발포사건, 계엄사령부 발표는 전국에서 115명 사망, 777명 부상. 이날 데모 대열에 함께 했던 나는 마감시간이 되기전에 광화문우체국으로 가서 영천 아버님께 전보를 쳤다. “홍목무사 안심경망” 여덟 글자였다. 그리고는 종로2가 쪽 관훈동 고모님 댁에서 밤을 지내는데, 간헐적으로 총포 소리가 밤잠을 설치게 했다.이번 여섯 차례의 촛불집회를 지켜보면서 격세지감이 들었다. 그때는 총을 쏘며 전쟁터를 방불케 했고, 지금은 쏘지 않으면서 평화로운 시위하는 점이 달랐다. 그때는 불과 몇 만 명이었는데도 정권이 스러졌고, 지금은 이백만 명을 헤아리는 데도 명쾌한 해결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그렇다면 당시 정치권은 어떻게 대처 했던가? 4월 21일 자유당 전 각료들이 일괄 사표를 제출했다. 22일 각 병원으로 부상자를 위문한 장면 부통령은 23일 이대통령 하야 촉구를 위해 부통령직 사퇴서를 낸 다음 11시 5분 민주당중앙당부에서 내외신 기자회견을 통해 “이 박사의 하야가 내 최대의 목표이며 내각책임제 개헌을 하려면 현 국회를 해산하고 새 국회를 구성한 후 해야 옳을 것입니다”고 말했다. 승계권 있는 부통령인 자신이 사임하지 않으면 사태의 최종 책임자인 이 대통령이 사임하지 않을 것으로 봤기 때문이고, 실제로 26일 이 박사는 안심하고 대통령 사임서를 정식으로 국회에 제출했으니, 4·19의 역사적 봉기는 중대한 전환점을 맞이했던 것이다.이승만 정권을 이어 받아 내각책임제 제2공화국으로 이어준 과도정부 수반이 된 허정 대통령권한대행은 나중에 「내일을 위한 증언」(1979, 샘터, 216쪽)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4월 25일, 나는 전갈을 받고 이 대통령을 만났다. 그는 역시 강력하게 입각을 요구했다. 이미 자유당과도 헤어진 이 고독한 거인에게 더 이상 고통을 준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차마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고, 또한 하루 빨리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작은 힘이나마 보태는 것이 국민으로서의, 그리고 정치인으로서의 도리일 것 같아 나는 입각을 결심했다. 이 박사는 그 자리에서 새로운 내각의 인선에 착수했다. 나는 이러한 혼란 속에서는 법의 정신에 투철한 사람이 입각해야 질서를 회복할 수 있으리라는 뜻에서 내무부장관에 이호(영천 출신)씨, 법무부장관에 권승렬 씨를 천거했다. 두 사람과 함께(입각하며) 내가 수석 국무위원인 외무부장관으로 입명되었다.”외무부장관으로서 허정이 지명되었던 것과 결부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승만이 사임을 결심할 경우에 부통령이 없는 상황에서 허정이 대통령직 대행을 맡게 된다는 데에 있었다. 4월 25일 이날 서울의 각 대학 교수 259명이 “대통령 이하 3부요인들은 3 ·15부정선거와 4·19사태의 책임을 지고 즉시 물러나는 동시에 정부통령선거를 다시 하라”는 내용의 시국선언문을 채택하고, 구속학생의 즉시 석방을 요구하면서 시위에 나섰다. 이 날의 교수 시위는 자유당 정권 퇴진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에 자극받은 일반군중들은 계속해서 야간 시위를 벌이며 “자유당 정권 물러가라”고 외쳤고, 4월 26일에는 다시 학생들이 거리를 메워 태평로는 4·19 때와 같은 혼란이 거듭되었다.
즐겨찾기+ 최종편집: 2025-05-02 19:10:37 회원가입 전체기사보기 원격
트위터페이스북밴드카카오톡네이버블로그URL복사
동정
이 사람
데스크 칼럼
가장 많이 본 뉴스
상호: 경북동부신문 / 주소: 경상북도 영천시 최무선로 280 /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경북, 다-01264 / 등록일 : 2003-06-10
발행인: 김형산 / 편집인: 양보운 / 청소년보호책임자 : 양보운 / 편집국장: 최병식 / 논설주간 조충래
mail: d3388100@hanmail.net / Tel: 054-338-8100 / Fax : 054-338-8130
본지는 신문 윤리강령 및 그 실요강을 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