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굽이 맑은 시냇가에서(훈)/초가 삼간을 지었네(지)/와룡안 만고토록 남아있고(훈)/서봉안 겹겹이 둘러 있네(지)/ 이미 학문이나하고 책이나 읽으려고 약속을 하였으니(훈)/과거에 두었던 마음 사라졌음을 무엇하러 논하겠는가?(지)/여러사람들이 때때로 나를 부추기지만(훈)/글이나 지으면서 함께 배회하리라(지)/
이 시는 훈지수 형제가 한때 관찰사 박문수가 특별히 덕행으로 천거하였고, 이조판서 송인명, 대사성 조문명 등이 왕에게 추천하여 벼슬을 내렸지만 응하지 않았는데 그 심경을 읊은 「횡계서사」이다. 조선 후기 영천을 비롯한 전국의 많은 선비들이 문장과 도학을 찾아 두 형제의 남다른 우애와 충, 효, 검, 공(忠孝儉恭)으로요약되는 삶의 자세를 배우기 위해 훈지수 형제를 찾았다.훈수 정만양(鄭萬陽·1664~1730)선생과 지수 정규양(鄭葵陽·1667~1732)선생은 고려시대 포은 정몽주의 문손으로 6대조 정윤량은 퇴계 선생의 문인이시며, 5대조 호수공 정세아는 임란 의병장으로, 고조부 정안번은 부사과를, 증조부 정호인은 관찰사를 역임했다. 조부 정시행은 무공랑을, 부친 정석주는 진사이다. 양수(훈수·지수를 일컫음)선생은 어릴 적부터 한번 배운 것은 잊지 않는 총명하고 덕기(德器)있는 아이로 훈수선생 12살, 지수선생 9살 때 종조부 학암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존재 이휘일, 갈암 이현일에게 사사받았다. 훈수선생이 17세 때 학사 오도일이 좌천되어 울진현감으로 근무할시절, 사방의 인재들을 모아 시험을 치르게 한 일이 있었다. 그 때 오도일은 훈수의 답안지를 보고 “이 사람은 보통의 시험생이 아니다”라며 감탄하였다. 두분의 호 양수는 형제간의 우애를 나타내는 훈지상화(壎相和)’로 형제가 서로 시전(詩傳)의 한 구절인 ‘맏형은 흙으로 만든 나팔을 불고, 동생은 대나무로 만든 피리를 분다’에서 화목함을 비유할 때 쓰인 의미로 훈과 지를 택하여 호를 삼았고, 삼례도를 삼고하여 악기 훈(塤)과 지를 제작하고 악보를 직접 만들어 형제가 함께 연주하며 우애를 나누었다. 저술도 ‘훈지록’이라 했고, 자손의 이름도 훈, 지 두 글자의 변과 머리를 따서 짓도록 하여 지금까지 시행되고 있다. 집안의 흥망성쇠는 형제의 우애로서 이룩되고 국가발전의 열쇠 또한 국민의 한마음 한뜻에 달렸음을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라면 부모·형제도 없고 이웃도 모르는 오늘의 세태에 견줄 얼마나 귀한 가르침인가! 훈수·지수선생은 가정에서 전하는 1천여권의 고서를 모조리 독파하고 힘을 합해 정진하여 ‘훈지록’ 16권, ‘곤지록’, ‘이기집설’, 가례차의, 개장비요, ‘의례편고’ 대학보유, 상지록(尙志錄) ‘모현록(慕賢錄)’ ‘심경질의보유’ ‘계몽해의’ ‘외국지’ ‘산거일기’ 등 10여종에 100여권에 달한다. 군정(軍政), 전정(田政), 공거(貢擧) 등 30여 분야에 걸쳐 실학을 아우른 방대한 저술들이 남아있다. 오롯이 제자와 향내를 계도하기 위해 살아온 훈지수 형제는 경사(經史)는 물론 성리학, 예학, 천문, 지리, 역학, 정치, 경제, 율려(律呂), 과제(科題) 등에 두루 정통하였다. 특히 춘추좌전, 국어, 한나라 양웅, 사마천등을 애독하였다고 한다. 횡계서당을 건립하여 후진양성에 힘을 기울여 제자들이 더욱 불어나 수용이 어려워 지자 횡계서당 위(상류)쪽에 옥간정을 짓고 내왕하는 생활 속에서 제자들에게 한치의 광음도 아껴 독서에 전념토록 하며 나라의 인재로 성장할 것을 독려하였다. 훈수 선생이 옥간정에서 임종 때 자손들에게 남긴 유언은 ‘충·효·검·공’ 네 글자였다. 즉 ‘사군이충’(事君以忠) ‘사친이효’(事親以孝) ‘양덕이검’(養德以儉) ‘지신이공’(持身以恭)을 가훈으로 내렸으며, 제자에게는 ‘지려명절’(砥礪名節), ‘명분있는 절의를 갈고 닦으라’는 말을 남겼다. 그가 남긴 ‘충효검공, 지려명절’ 8자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명심해야 할 선현의 가르침이다. 이현일의 사후 “북의 밀암(이재의 호), 남의 훈수(정만양의 호)”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한 시기 영남의 유림의 영도로, 벼슬에 나가지 않고 오로지 학문연구와 저술, 제자 양성에 전력한 결과 문인록에는 217명이 등재 되어있을 만큼 정중기, 조현명, 정간, 이유, 신준 등의 많은 명현을 길러냈으며, 오늘도 횡계구곡과 횡계서원의 320년전 심은 향나무가 훈지수 두분 선생의 기상을 기리는 듯 우람하게 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