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의 소용돌이속에 아들 형제를 불러 놓고 “나라의 앞길이 이처럼 어려울때 문무가 따로 있겠느냐? 너희들은 책을 덮고 붓대신 창과 칼을 잡고 너희 자형을 따라서 군민과 함께 전장터로 나가 나라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 사람의 도리 중에는 집안에서는 부자의 의리, 나라에서는 임금과 신하의 대의가 가장중한 것이니 싸움터에 나가 충성을 다하는 것이 곧 부모에 효도하는 것이고, 나라에 충성하는 길이니라.” 임진왜란 때에 성덕룡이 두아들 성훈과 성적에게 사위인 권응수의 군막에 합류하도록 명하는 내용이다.성덕룡(成德龍1519~1600)의 본관은 창녕, 자는 문약(文躍) 호는 망학(望鶴)이며, 창녕 성씨는 고려 중엽때 향직의 호장을 역임한 성인보를 시조로 손자 성공필 · 성한필 대에서 크게 두 계통으로 갈라져 6세에 내려와 성기(成紀)를 파조로 하는 판서공파(判書公派)를 포함하여 13파로 분파되어 세계를 이어왔다. 고조는 성세명, 증조는 성달문, 조부는 성욱이다.경기 포천에서 옛 신령현 생천으로 이거해 와서 영천군과 인연을 맺은 아버지 충순위 성오원은 판서공파 신녕 입향조이다. 어머니는 나주정씨이며, 부인은 숙부인 문소 김씨로 김치해의 딸이며, 2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판관 성훈(成勳)과 참봉성적(成績), 사위는 화산군 권응수이다.천성이 어질고 온화하고 백학산이 있어 깨끗하고 속기가 없는 자연속에 은둔하면서 학문을 닦고 예절을 숭상하던 성덕룡은 학교와 교육진흥에 남다른 힘을 기울여 신령현감이었던 금계 황준량과 뜻을 같이하여 고을의 선비들과 더불어 백학산 아래 양강의 위에다 백학서원을 창설하는데 힘을 합쳤다. 퇴계 이황선생께서 손수 백학서당이라는 글을 써 주시고, 백 년대계인 교육의 터전을 마련하여 그의 두아들을 비롯하여 지역여러 선비들과 문풍을 진작시켰다.문무를 겸비한 두아들이 임란에 나설즈음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우애가 남달리 돈독하였다. “나라에 충성함이 부모에 효도됨은 알겠사오나 늙으신 부모님을 누가 모시겠습니까?심히 걱정이옵니다.”고 하자, “나라에 충성하려는 이판에 사사로움에 얽혀 충성을 못함은 이 애비의 참뜻을 거역하는 것이니라”고 아들들에게 당부했다.아버지 성덕룡의 고명한 뜻을 받들어 영천복성과 경주, 대구 등지에서 혁혁한 공훈을 세웠으며 성훈의 벼슬은 판관으로 선무원종공신에 책록 되었다. 또한 전쟁 속에 연로한 부모가 걱정이 되어 형제끼리 의논 끝에 형인 성 훈은 계속 해서 전쟁터에 남아 나라를 지킴에 사활을 걸고, 공훈으로 군자감봉사로 제수되었지만 성적은 귀향하여 형의 몫까지 효성을 다하여 학문에 열중하여 참봉에 제수되었다.애국충정과 충효를 다한 절의, 사위 권응수장군의 공훈에 힘입어 예조참의 증직이 내려졌다.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이에 이 고을 선비들은 그를 추앙하여 화남면 대천리 대천서원(大川書院)에 제향케 되었고, 그를 위한 망학정(望鶴亭)이 세워지고, 맏아들 성 훈을 위해 생천동구에 기적비가 세워지고, 동생 성적을 위해서는 화동에 모와정(慕窩亭)이 세워졌다. 조선은 충과 효를 중시하는 사회이지만 충보다는 효를 우선시 하는 가족중심사상이 강하였다. 그러나 성덕룡선생은 가족보다는 국가를 우선시 하는 대인다운 풍모가 돋보인다. 국가의 위기 앞에 자식들에게 국가를 위하여 당당하게 내세웠던 창녕성씨 문중이 오늘날 개인중심사회에서 더 위대하게 보이는것은 우리에게 말없는 교훈이 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