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시동을 걸었다. 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고백한 남편의 심정을 어떻게 헤아려야할까. 내가 서둘러 남편의 발목을 잡아두려 했던 것은 아닐까. 그만큼 부담감으로 받아들였다면 내 존재는 아직 미미하다. 어쩌면 주위를 말끔하게 청산한 뒤 내 존재를 받아들이려는 의도는 아니었는지. 아니면 결혼을 전제로 한 만남에 부합하기 위해 조금 더 나은 한사람을 저울질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나를 떠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애초에 없는 또 다른 한사람의 존재를 등장 시킨 것은 아닌지. 수많은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영천 시내로 차가 진입했다. 도로는 한산했다. 늦은 일요일은 음식점도 술집도 도로도 왠지 낯설었다. 사람들은 월요일을 위해 저마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컨디션이며 몸 상태를. 월요일이 주는 무게를 최소화하기 위해 가급적 최상의 시간을 끌어 모으고 있었다.신호등 앞에서 차가 멈췄다. 초겨울의 밤거리는 고즈넉했다. 남편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동시에 웃었다. 우리는 긴 하루를 같이 보내며 무언가를 잡은 듯도 했고 놓친 듯도 했다. 이 미묘하고도 알수 없는 느낌이 서로의 간격 사이에서 꿈틀거렸다.그래도 서로를 다가갈 수 있는 거리감을 좁혔고 스킨쉽이 자유로워졌다. 두 시간 전만해도 남편의 혀가 곳곳을 헤집고 다녔다. 몸이 오그라들기도 했다. 두 다리에 스치고 지나가는 날카로운 전율로 나는 몸을 떨었다. 기분 좋고 포기 할 수 없는 느낌의 끝을 위해 남편은 혀를, 손을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결승점은 두 사람의 몫이었다. 언덕위에 깃발을 뽑아들기 위해 야생마의 울음과 허벅지가 필요했다. 본능과 경험으로 일구어 내는 한 몸이었다. 컴퍼스의 중심점이 필요했다. 이제 중심점을 축으로 한 개의 원을 두 사람이 만들어 내면 소중한 우리가 되는 것이다.남편은 이미 함께가는 절정을 알고 있었다. 낙오되지 않게 이끌어주거나 부축해가며 결승점 앞에서기다려주는 인내심도 있었다. 내가 힘겹게 결승점에 다다를 설 때 그때 남편은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내 몸 안으로 스며드는 남편의 존재를 느꼈다. 야생마. 속으로 남편의 별명을 지어주었다.야생마 길들이는 방법을 어디에서 읽은 적이 있다. 길길이 날뛰는 야생마를 어렵게 잡아 목에 연결고리를 만들어 조랑말과 연결해두었다. 야생마는 푸른 들판 속의 자유를 포기할 수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치솟는 본능이 질주의 자유를 누구도 제어하지 못했다. 달려야만 살아있다. 살아 있다는 것은 거칠 것 없는 전진이다. 그런 야생마에게 조랑말이 끌려오거나 서로 뗄 수 없는 끈으로 묶여져 한 몸처럼 움직이고 있다. 야생마에겐 얼마나 큰 멍에인가. 고통인가. 고문인가. 달아나고 싶다. 이 작은 조랑말로부터. 언제나 그랬듯 조랑말은 느긋하다.잰걸음으로 따라 붙을 때가 있지만 자신의 보폭으로 투정도 부리지 않고 이리 저리 따라다닌다. 멀찌감치 떼놓기 위해 아무리 힘을 쓰도 애물단지처럼 따라붙는다. 그때쯤 야생마는 제풀에 지친다. 곧 고분고분해진다. 자신이 모르는 더 큰 힘이 지배한다는것을 안다. 남편의 조랑말은 조율되지 않은 내 몸이 적격일까. 언제나 찾아와 조율할 수 있는 내 몸의 주인으로 만들어준다면 야생마 길들이기는 성공한 것은 아닐까.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