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헌기 전 국회의원은 초졸 학력으로 국회법제사법위원장을 역임한 3선 의원을 지낸 정치인이다.대창면 출신인 박 전 의원은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초등학교만 졸업했다. 그 이후 대창면사무소에서 사환으로 근무하면서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1961년 제13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다. -오랜만에 고향 영천방문, 그 동안 정치생활 소회 밝혀지난 9일 채널경북 별관 3층에서 열린 영천선원포럼 초청 특강에 나선 박전 의원은 3선 국회의원 활동을 하면서 느낀 소감과 국회의원으로 출마하게 된 배경 등에 대한 지난 소회를 밝혔다.이 자리에는 선원포럼 회원들을 비롯 해 지역 정치인 등 많은 지역 원로들이 참석해 특강을 청취했다.그는 이 자리에서 최근의 대통령 탄핵 사태로 인해 국민이 분열되는 사안에 대해 우려와 함께 국민들의 단합을 강조했다.대구 중구청에서 발간한 자신의 일대기 제목을 ‘개천의 용은 죽지 않는다’로 정할 만큼 배우지 못했다는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달려온 한 평생이었다고 회고하는 그의 강연내용은 진솔했다. “제가 영천에서 14대 국회의원에 출마한 것이 벌써 25년이 됐다”고 운을 뗀 그는 “당시 국회의원 후보자 합동연설회가 있었는데 제 나름대로 연설문을 열심히 작성했는데 연설회 후에 변호사가 어떻게 그렇게 말을 못하느냐는 말을 들었다”고 회고 한뒤 “당시 상대 후보는 달변가였기에 더더욱 차이가 났던모양”이라고 덧붙였다.“요즘 국회의원 해 먹은 죄로 말도 못하고 있다”는 그는 “얼마 전에는 검사장 출신에다 부장판사 출신까지 구속되는 세태라 법조생활에다 정치를 해왔던 저로서는 할말이 별로 없다”고 최근 법조계의 상황을 걱정했다.자신이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했던 14대 국회 당시에도 정치인들은 욕을 많이 먹었다고 밝힌 그는 “그때도 목사와 선생님 국회의원이 한강에 빠졌을 때 한강오염을 막기 위해서 국회의원을 가장 먼저 건져 올려야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며 당시 정치인에 대한 국민들의 시각을 대변했다. 이런 시궁창 같은 정치판에 뛰어든 이유에 대해 그는 “초등학교 밖에 못나왔기에 사회생활하면서 수없이 겪었던 학력컴플렉스라 할수 있는 열등의식을 극복하기 위해서”라고 밝혔다.대창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상급학교로 진학해서 교복을 입고 다니는 친구들이 너무 부러웠다며 면사무소 사환으로 일하면서 열심히 공부한 끝에 보통고시에다 고등고시에 합격했다. -14대 무소속 당선후 YS로부터 입당권유 받아대창면 신광리 계상마을 출신인 그는 “주경야독으로 고시공부를 하던 고향마을의 정자 이름이 지헌서당”이라며 지헌선생은 자신의 선조라고 밝혔다.면사무소 사환으로 일하면서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았던 어린 시절은 물론 고시합격 이후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학력컴플렉스는 계속 이어졌다고 한다.“5관구 법무관(대위)으로 복무할 때 박 중령이라는 참모와 법률문제로 논쟁이 붙었는데 제가 우기니까 이 사람이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은 놈이 뭐 그렇게 박박 우기느냐는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질 정도로 열등의식을 느꼈다”고 말했다.명문대를 나온 엘리트들이 대부분인 법조인 모임 같은 곳에서 출신학교가 어디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얼버무리기 일쑤였다고 했다.1991년 4명의 자녀들을 모두 다 출가시키고 나니 허전했었다는 그는 매년 자녀들의 가정환경조사서 작성시 부모 학력난을 쓸때 마다 신경 쓰이고 자존심이 상했다고 한다.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했다는 열등의식을 탈피하기 위해서 이듬해인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에 출마하게 됐다고 한다. 시·군이 분리돼 있던 당시 대구변호사회장 재임시 만났던 안기부 간부등 주변에서 출마권유도 많이 받았다.안기부 간부로부터 “서동권씨는 안나온다. 사립재단 이사장이란 분도 불출마다. 영천에는 무주공산이니까 출마하라”는 적극적인 권유를 받았다는 그는 곧바로 종친들에게 공천 받게됐으니까 지원해달라고 부탁했다.14대에는 무소속, 15대 때는 여당으로, 16대 때는 야당으로 골고루 당선됐다는 그는 14대 무소속 당선후 YS에게 두 번 불려가서 입당권유를 받았다.YS를 두 번 만날때마다 오후 7시경 똑같은 시간에 갔었는데 그 시간이면 거제 부친에게 안부전화를 하던 모습을 보고 호감을 가졌다.두 번째 면담때는 입당원서를 내놓고 서명하라고 하길래 선거 기간중에 당선되면 여당에 입당하겠다고 말했었지만 무소속 당선자들끼리 한꺼번에 입당하자는 약속이 있었기에 거절했다는 일화도 들려줬다.선거를 치를 때 학력 때문에 애를 많이 먹었다는 그는 상대후보들이 지역발전을 위해서는 학연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을 때 “학연만 다냐? 나는 고시선후배 동기도 많다”고 대응했다고 한다.그는 감사원장을 하던 이회창씨도 고시 동기이고 부산출신의 대통령 비서실장도 고시 후배라는 논리로 맞받아쳤다는 것.15대 국회의원 선거때는 지역에서 박헌기 의원은 공천받지 못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고 했다. 그는 당시 출마의지가 강했던 서동권씨가 “박 의원, 이번에 공천 못받아도 섭섭하게 생각마라”는 말에 “내가 한번 더해야 하는데요”라고 맞받아 쳤다고 했다.당시 청와대에 있던 박한철 전 헌법재판소장 부탁으로 YS변론을 맡았던 인연이 있어서인지 15대때 여당 공천을 받고 당선 됐다고 했다. 당시 YS가 15대 공천때에 안기부장 출신 서동권씨에게 “영천은 박 의원이 있지않느냐. 대구로 출마해보라”고 권했다는 말을 나중에 전해들었다.박 전 의원은 16대 국회의원에서 야당으로 출마했을 때가 세 번 선거중 가장 쉬웠다고 했다.그는 그때만해도 여당공천만 받으면 당선되는 시기였지만 그만 하겠다고 생각한 것은 나이도 있고 국회법제사법위원장도 지냈으면 됐지 싶어 일찍 그만 두려고 했다고 한다.“고 이만섭 전 국회의장이 왜 그만두려느냐며 크게 만류했었다”는 그는 의원총회에서 “사람은 돌아설 때 뒷모습이 아름다워야 한다. 아쉬울 때 돌아서는 것이 순리”라고 밝혔다고 한다.그는 “원숭이는 떨어져도 원숭이지만 국회의원은 떨어지면 사람도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청렴하게 국가이익 우선하는 국회의원 돼야14대 국회의원 당시 재산도 날아가 버리고 힘들었다고 한다. 그는 언변도 없고 노래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 국회의원 생활이 생리에 맞지 않았지만 당선 됐으니까 열심히 하자는 생각으로 국회의원직에 임해왔다고 말했다.“영천시민들께서 제가 고학으로 사법시험에 합격한 점과 함께 너도나도 마음껏 배우지 못한 것에 대한 동질감을 느끼셨던 덕분에 국회의원에 세 번씩이나 당선된 것 같다”며 그는 시민들의 성원과 도움에 감사의 뜻을 표했다.그는 후배 국회의원들에게 “청렴해야하고, 국가이익을 우선으로 양심적으로 직무를 수행해야한다는 헙법 46조 2항에 명시된 국회의원의 의무를 꼭 지켜줄 것”을 당부했다.평생 동지로 살아왔던 부인과는 3년전에 사별했다는 그는 병상에 있던 부인을 돌보느라 밤에 잠이 잘오지 않는 등 한때 우울증 진단도 받았다.“최근 25년전 기호 3번 무소속으로 출마했을 때의 사진을 보며 나도 살만큼 살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그는 팔순을 넘겨서도 대구팔공합동법률사무소 소속 변호사로 적을 올려놓고 한달에 두어번 출근한다. 국회의원을 그만두니까 예전에는 깍듯이 인사하던 사람이 외면하는 모습도 봐왔다는 그는 이제 아침에 일어나면 내가 살아 있구나, 오늘도 즐겁게 지내야겠다라는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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