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이라면 레타르에서 술을 샀던 거구의 말레이시아인이 가이드 일인을 앞세우고 포터 둘에게 짐을 맡긴 채 말을 타고 쏘롱나를 패스했는데, 그 걸음이 우리 일행보다 훨씬 느려 우리의 뒤를 따른다는 것이다. 내리막길 끝의 롯지에서 허기진 배를 채우고 저 멀리 보이는 묵티나트를 향하는데 이제는 몸이 지쳐 평지 길도 힘들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끌고 호텔에 도착해서 시간을 보니 거의 12시간이 걸렸다. 이제 할 일을 다마친 기분이다. 히말라야에서의 마지막 밤,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단잠을 이루니 역시 사람은 육신을 피곤하게 해야 번뇌를 줄일 수 있지 않은가 싶다.길을 걷는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십대제자 중 가장 으뜸 제자인 지혜제일 사리풋트라와 신통제일 목갈라나의 출가 동기가 바로 걸음걸이에 있다. 전법의 땅 사르나트 녹야원에서 붓다는 다섯 비구에게 당신이 깨달은 진리를 전하게 된다. 다섯 제자가 번갈아가며 왕사성으로 탁발을 나가 걸식을 하면 나머지는 쉬지 않고 설법을 듣는 방식이었다. 앗사지 비구가 탁발을 나갔을 때 그 걸음걸이의 위의가 참으로 단정함에 감복한 사리풋트라가 앗사지 비구에게 질문을 던진다.참 스승에 목말라하던 그는 앗사지 비구와의 대화를 통해 곧바로 진리의 세계를 접한다. 그리하여 도반인 목갈라나와 의논하여 외도 산자야의 제자였던 다른 도반 250여명 데리고 붓다를 찾아와 마침내 위대한 법을 만나게 되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불교경전에 전해온다.홀로 걸어야 한다. 둘이 혹은 여럿이 걸어도 걸음은 언제나 홀로다. 둘이 혹은 여럿이 걸으며 서로의 걸음에 힘이 될지라도 역시 걸음은 홀로다. 홀로 걸으면 고요하다. 고요 속에 번뇌의 그림자가 보인다. 번뇌(煩惱)는 곧 보리(菩提)다. 번뇌가 없이는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갈 수 없다. 무수한 윤회의 수레바퀴에 휘감겨 살아온 업식(業識)이 있으니 내 업의 티끌을 먼저 보아야 한다.그래서 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걷고 있는 내 모습을 가만히 살피면 발 걸음새가 보인다. 팔자걸음인지 일자로 걷고 있는지가 보인다. 몸이 피곤을 느끼는지 가벼운지도 보인다. 마음이 무거운지 편안한지도 보인다. 그리고 내 마음이 그려내는 망상(妄想)의 그림자들도 볼 수있는 것이다.십여 년 전에 친구와 둘이서 히말라야 트레킹을 한 적이 있다. 그 때는 젊은이의 만용(蠻勇)으로 20Kg 가까이 되는 배낭을 각자 메고 가이드는 물론이고 포터도 채용하지 않았다. 인터넷으로 찾은 자료만 들고서 안나푸르나 라운딩코스에 도전했다가 고산증으로 고생만하고 중도에 포기했기 때문에 늘 아쉬움이 남았다. 2016년 12월 16일, 히말라야를 향해 아름답지만 시끄러운 이 땅을 떠나게 된 이유 중의 하나다.이미 오래 전 인도 성지순례를 통해서 글자의 의미를 다시 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만, 어린 시절 팔상성도(八相成道) 중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은 나의 뇌리에 깊게 새겨졌다. 그래서 설산(雪山)이라는 단어는 나를 매우 설레게 한다. 히말라야로 떠나게 된 또 하나의 이유다. 해발 7,000m가 넘는 설산 봉우리들이 아침 햇살을 받아 황금색으로 빛날 때는 넋을 잃고 만다. 카트만두에서 포카라까지 이동하는 경비행기 안에서 내려다보이는 안나푸르나 산군(山郡)들로 벌써 가슴은 벅차다. 13일간의 안나푸르나 라운딩 트레킹은 벅찬 가슴으로 시작되어 숨쉬기 힘들어 벅찬 가슴으로 힘겨워하다가 마침내 환희로 벅찬 가슴을 안고 내려온 일정이다.공부하는 행자(行者)에게 참으로 중요한 가르침이 팔정도(八正道)인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산은 그냥 앉은 채로 바른 견해를 가지고 바르게 보아야함을 나에게 가르친다. 라운딩 코스는 해발 약 900m에서 출발해서 5,416m의 쏘롱나를 패스해야 한다. 처음 출발하는 낮은 곳에서 앞을 보면 큰 산이 앞을가로막는다. 꽤 높다. 그러나 고도를 높여 걸으면 그 산 뒤로 더 높은 산이 나타난다. 그러기를 수없이 반복하는 동안 나는 역시 수없이 지금 눈앞에 있는 산이 그 산인 줄 착각하는 어리석음을 반복한다. 선입견(先入見), 편견(偏見)에 눈이 어둡다. 순간순간에 사로잡혀 내일을 기약할 줄 모르는 이 무지(無智)를 어쩔 것인가. 다행히 불법을 만나 많이 지을 허물을 적게 짓고, 조금이라도 적선(積善)과 작복(作福)의 인연을 지으며 살려고 노력한다.언제부터인가 사람의 도(道)를 이야기한 성인의 가르침을 고리타분한 고전(古典)으로 분류하고 오직 욕망의 충족만을 위해 사는 것을 최고선(最高善)으로 삼는 시대가 된 것 같다. 나만 배부르면 된다는 생각에 빈익빈(貧益貧) 부익부(富益富)의 편중 현상도 심화되고 있다. 사회 지도층의 부조리는 그 정도를 넘어서 국민의 공분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중도(中道)를 외면하고 각자의 치우친 견해[偏見]로 세상을 끌고 가려한다.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심각한 사상적 갈등을 겪고 있다. 나 아니면 안 되는 걸까? 상대를 존중하고 그 의사를 반영하면 내가 무너지고 마는 걸까? 이 사바세계의 무명을 밝힐 지혜도 필요하거니와 각자의 자리에서 ~답게 살아가는 온전한 나라가 되기를 발원하는 기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히말라야로 떠나면서 자신에게 세운 명분이다.시절 인연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다고 팽개치면 너무도 비불교적이다. 인연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씨앗을 심고 조건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전법(轉法), 전도(傳道)가 필요하다. 절이나 교회를 찾아 복을 구하거나 교세를 확장하는 포교, 전도가 아니라 성인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고 참되게 살고자하는 성도(聖徒)가 되는 길을 보여주고 열어주어야 한다. 그것은 결코 억지로 권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불교에서 포교(布敎)는 법을 전하는[傳法] 것이 아니라 법의 수레바퀴를 굴리는[轉法] 것이라 쓰는 이유다. 사리풋트라가 반한 앗사지 비구의 걸음은 가식으로 만들어 낼 수 없다. 설산(雪山)을 걸으면서 서산대사의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를 음미해본다.踏雪野中去(답설야중거) 눈 내린 들판을 걸을 때에는 / 不須胡亂行(불수호난행) 모름지기 어지러이 걷지 말라. /今日我行跡(금일아행적) 오늘 걷는 나의 발자국은 / 遂作後人程(수작후인정)뒤따르는 사람의 이정표가 되나니.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