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굶으면 서산( 西山)을 본받겠고 / 먹으면 첩산(疊山)을 본 받으리/ 숨어서는 우산(盂山)을 본 받겠고 / 피하면 비산(鼻山)을 본받으리/ 살아서는 냉산(冷山)을 본받고/죽으면 문산(文山)을 본받으리. 만나는 대로 육산(六山)을 본받겠으니 구릉도 가히 산을 배우리라’. 이 시는 이태일 선생이 쓴 「육산가」로 절의의 상징인 서산 백이숙제 등 호에 ‘산’ 자가 들어가는 중국 여섯 선비의 고고한 기개를 본받겠다는 내용의 충정과 절의를 나타낸 시다.이태일(李泰一1860~1944)선생은 한말 비운의 시대 유가적 의리와 자주의식을 투철히 지니고 살다간 대학자로 본관은 벽진이며. 자는 삼수, 호는 명암(明庵)이다. 고조부는 이인호, 증조부는 이재장, 조부는 이진현이다.아버지는 난포 이승원이며, 어머니는 달성 서씨로 사인(士人) 서상호의 딸이다. 부인은 안동 권씨 권승운의 따님으로 슬하에 후사가 없어 아우 이채일(李彩一)의 아들 이원형으로 뒤를 이었으며, 또 후취 부인은 순천 박씨로 아들 이원휘를 두었으며, 사위는 조기환·이석형·정재홍이다. 벽진이씨는 고려 삼중대광 개국원훈 벽진장군 이총언이 시조이며, 이견간과 조선초기에 생육신의 한분이신 경은 이맹 전선생이 모두 현조가 되며, 10대조 독락당 이지백과 6대조 소와 이석화는 퇴계학통을 계승하였다. 명암 선생은 어릴 때 왕고(王考)에게 수학하고, 후에 권재동(權載東) 문하에서 사사받았다. 빼어나고 특별한 기개와 넓고 굳센 자질로서 의리의 학문을 계속하였고, 재능과 성품이 동료들보다 뛰어나서 13~15세가 되기 전에 경전을 통달하였고 과거시험의 학업을 닦으니 문사를 일찍이 성취하였다. 명암 이태일은 넓은 방면으로 공부하여 성리학의 일가를 이루고 항상 정대한 마음을 가져 품행을 갖추고 이치를 탐구하는 것으로 근본을 삼아 주역에 깊이 심취하였다. 1888년(고종 25)에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상경했으나 매관 매직이 성행함을 보고 탄식하며 벼슬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와 오직 후진 양성에 진력하였다. 1891년 경상도관찰사 이헌영이 향음주례를 거행하자 명암은 나이가 어렸음에도 주례의 자리에서 집례하여 덕망이 있음을 칭찬받고 특별히 국법에 40세 전에는 천거할 수 없는데도 특천으로 조정에 천거하였다. 하지만 그는 평소 “군자의 출처는 의에 합당한 때를 맞추어 이루어질 뿐이다. 다만 물을 마시며 경전을 연구하고 선현을 계승하여 후인을 기르는 것이 나의 사업”이라고 하여 나아가지 않았다. 또한 정승 민영휘가 만나고자 청했으나 응하지 않으니 이에 사람들은 영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왜 놓치는가 안타까워 했다. 그 후 1909년에 문묘수임을 맡았으나, 이듬해 경술국치를 당하자그만두고 돌아 왔다. 1913년 한일병합 유화책으로 일황(日皇)의 기념훈패를 유명인사들에게 돌렸는데 선생에게도 ‘한일강제병합기념훈장’을 전하자 명암은 크게 분노하면서 거절했다. 일본 경찰은 그래도 칼을 들이대며 훈장을 받지 않으면 목을 베어 일왕에게 바치겠다고 위협하자 명암은 “나의 목이 베일지언정 훈장을 받을 수는 없다” 하여 받지 않을 것을 맹세하는 육산시를 지었다. 또한 죽음까지 불사한다는 서사문(誓死文)을 지어 민족의 위기를 자신의 생명과 바꾸려는 유가의 의를 지키며 대항하니 일본인도 ‘충의와 도덕을 갖춘 선비’라하며 물러났다. 이태일 선생은 위정척사와 항일의식에 대한 일관된 신념을 바탕으로 일제에 한 점의 굴함도 없이 전 생애를 왜정과 맞서 끝까지 저항하였으며, 당시 항일투쟁에 앞장선 안동지역 의병장인 서산 김흥락, 향산 이만도, 척암 김도화 등과도 긴밀하게 교류하였다. 또한 성리학에 매진하고 후학을 양성하는데 전력을 기울여 문하에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으며고향인 영천시 자양면에 용산서당 등을 세우고 풍운의 시대에 강학과 저술에 전념하면서 오로지 학문과 나라 사랑으로 일관된 삶을 살다가 유가의 의리와 자주의식의 신념을 후학과 많은 사람들에게 남긴채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저서로 『명암집』 『정학통록』 『태평책』 『대학회의』 『홍범정오』 『태극해』 『주역회의』『 용산답문록』『 언행록』 등 50여점이 있다. 명암 선생의 숭고한 삶과 정신은 항일척장비에 우뚝하게 드러나 오늘을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크나큰 교훈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