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은 충신묘에 푸르고 꽃은 효자각에 밝아라. 동풍은 불어와 끝이 없는데 두견 새우는 한은 어떠리오.
제용호서당에 나타난 충과 효가 출중하여 어머니를 봉양하고 나라를 사랑함이 크고 높았던 김기상, 김애상 형제를 추모하는 글귀다.김기상(金麒相1558~1623)선생의 본관은 의성으로 의성 김씨(義城金氏)의 시조는 경순왕의 넷째 아들 김석으로 고려 초 의성군에 봉해졌기에, 그 후손들이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김기상은 12세(世)로 예빈경 김인회를 파조로 하는 예빈경공파이다.고려 태자첨사인 용비(龍庇)의 후손이며 의성 김씨의 영천 입향조가 된다. 그의 자는 성서(聖瑞), 호는 다암(多庵)으로, 고조는 참봉 김처원이며, 증조는 수직(壽職) 통정대부 김세명, 조부는 진사 김계원이다. 부친은 김순부이며, 모친은 현풍 곽씨로 사옹원주부 곽연종의 따님이다.부인은 숙부인 영천 이씨로 전력부위 이병렬의 따님으로, 슬하에 2남을 두었는데 증(贈) 가선대부 김경생과 김경남이다. 그는 청하면 소동에서 태어나 우뚝하고 바른 성품의 소유자로 부모에 효를 다하고 어른을 공경할 줄 알았다. 7세의 어린 나이에 부친이 세상을 떠났으나 소학을 배워 예를 행할 줄 알았고, 어린동생을 살뜰이 돌보아 형제간의 우애를 돈독히 하였으며, 어려운 형편에도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아우 김애상과 더불어 영일군 청하로부터 난을 피해 병든 모친 곽씨를 등에 업고 이르른 곳이 화남면 신호리로 피난하여 살면서 지극한 정성으로 봉양하였으며, 또한 의병을 모집하고 초유사 학봉 김성일에게 아우 애상을 의병의 군진으로 보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형제가 여묘살이 3년을 지내며 고서적을 읽고 자식과 조카들의 교육을 낙으로 삼았으며 후학을 키우며 여생을 보냈다. 1803년에 효도로써 조정에 알려져 순조 을해년에 포상이 내려졌으며, 통훈대부사복시정으로 추증되었다.도리를 행함에 반듯하여 효를 제일로 삼아 행하던 그는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실기를 남겼다.김기상의 아들 경생 또한 동지사 훈련대장, 개성부관리영사를 역임하고 집안의 내력인 충절에 본을 받아서, 왜란을 당하여 한양에서 세력을 결집하여 의병을 모으다 뜻을 이루지 못하여 자결하여 민심을 크게 독려케 하였으며 증 가선대부에 추증되었다.또한 김기상의 아우 김애상(金愛相 1561~1631)선생은 의병장으로 자는 성우(聖友), 호는 죽파(竹坡)이며, 부인은 증(贈) 숙부인 여흥 민씨로 민상기의 따님이며, 슬하에 3남을 두었는데 증(贈) 통정대부 김융원과 수직(壽職) 호군 김성원, 통정대부 김연원이다.어려서부터 천품이 어질고 효성이 지극하여 재주가 뛰어나고 많은 무리와 더불어 화합하니. 그 사람됨이 예와 도리를 따랐다. 또한 힘이 세고 용기가 뛰어나 임진왜란 때 의병진에 종사하여 영천성 탈환 등 수많은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충의와 절의로 나라를 지키고 효성으로 어머니를 봉양하였으며, 모친이 돌아가시자 극진한 예로 여묘(廬墓) 3년을 지냈으며, 나라의 관리로서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등을 역임하며 맡은바 임무에 충실하였으며, 후에 고향으로 돌아와 형과 더불어 후학양성에 온힘을 기울이다 7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803년에 효도로써 조정에 알려져 통정대부 이조참의로추증되었다.임 진왜란 때 의 병으로 참전하고 인간행동의 백행지본인 효를 최고의 본으로 삼았던 두 형제 김기상, 김애상 형제를 추모하기 위해 화남면 신호리에 후손들과 유림이 세운 용호서당(龍湖書堂)의 경효사에서 제향하고 있다.수신을 하고 부모에게 지극한 효를 실천하여 제가를 실천하고 나라의 위기에 두형제의 마음을 충으로 보답한 의성김씨 문중은 유학의 정신을 실천한 명문가이다.두 형제는 묵묵히 드러내지 않고 실천으로 후세인들에게 교훈을 던져준다. 그들의 삶은 거울처럼 투영되어 세월이 오래될수록 고색창연한 고가처럼 빛을 발하며 역사에 영원히 잊혀 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