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녘에 선비가 없기야 하오리만 공처럼 옛 법도를 지킨 이 없었다네, 우리 유도(儒道) 위기일발 이 지경에 놓였는데 그 누가 맡으라고 떠나셨단 말인가 ,선비의 기풍을 진작시키고 문덕(文德)을 발휘하여 명성이 퍼지니 노상의 행인도 모두 우러러 보았다고 할 만한 영천지역 유학의 거봉 낭산 이후 선생이 돌아가신 후 만락헌 장석인(張錫寅)이 지은 만사이다. 만락헌과의 인연은 차남 장뢰영이 젊은이로서 호방하고 대장부로 큰 포부를 가지고 있었으나 당시대의 상황이 불운하여 이리저리 자신의 인생멘토를 찾던 중 낭산 이후의 문하에 들어갔을때 아들의 행방을 찾던 중 낭산과 만나 교유하게 되었다.만락헌은 문경에서 대대로 부자로 알려진 집안이다. 1895년 을미의병시에 군자금 지원사건을 계기로 경기도 여주군 흥천면 외사리로 피신하여 50세가 넘은 나이에 경기지역의 대표적 유학자인 금계 이근원을 찾아가 화서학파의 맥을 이은 인물이다. 이로서 낭산과는 서로 다른 학풍과 원근의 거리를 떠나 서로 교류를 통해 학문적 지평을 더 넓히게 되었다.이후(李垕 1870~1934)의 본관은 전주, 효령대군 보(補)의 후손으로, 자는 선재(善載), 호는 낭산(朗山) 또는 구시헌(求是軒)이다. 증조부는 이정보(李廷輔), 조부는 이인하(李仁夏)이며 현재의 영천시 청통면 후평에 처음 옮겨 살았다. 부친은 이창우(李昌禹), 어머니는 청도 김씨로 김지령(金志齡)의 딸이다.부인은 영천 이씨로 이두흠(李斗欽)의 딸이다. 1남 5녀로 아들 이호대, 사위는 소욱·최인환·서팔수·정광호·이무순이다. 청통면 애련리 천곡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영특하여 5세에 이미 글을 지을 정도로 천성이 영민하여 여러 경전을 두루 섭렵하였다. 28세에 당시 거유였던 면우 곽종석을 스승으로 학문을 닦았으며, 마음을 오로지 주리학에 바탕을 둔 이후는 부모섬김에 혼신을 다해 봉양하고 돌아가셨을 때도 생전과 같이하였다. 국운이 기울고 나라를 지탱하던 학문이 무너지자 도학자로서 시대의 폐단을 적극 개진하였으며, 만년에 북산서당에서 후학 양성에 진력하였다. 학문에만 전력하는 대학자가 그렇듯이 일평생 가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 지역 문인들 중 학음 이종길 등을 비롯한 문인들이 스승의 가난의 그림자를 지워나가 스승에 대한 예우와 공경을 다하였다.정화식, 조규철, 이호대(아들) 등은 영남 3문장가이며 낭산 선생의 수제자이다. 저서로 28권 11책의『 낭산집』이 있으며 낭산문집의 원집은 1937년에 아들인 이호대가 편집 간행하고, 권말에는 송계 한덕련(韓德鍊)의 발(跋)이 있다. 65세로 별세했다.‘대공(大功)을 세우려는 사람은 반드시 큰 지략이 있어야 하고, 실업(實業)을 세우려는 사람은 반드시 진실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 각하는 군인으로 분연히 일어나 대권을 잡으시어 처음에는 정치도 맑고 법도 밝았으며, 관리도 청렴하고 백성도 자정하더니 세월이 점점 흘러감에 맑던 것이 탁해지고, 밝던 것이 흐려지니 어찌 각하의 마음 씀이 전후가 다르십니까?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1960년대 정권초기에 국정운영의 난맥상을 편지로 자문하였을때 중재 이호대 선생이 답한 글이다. 이호대(李好大:1901년~1981년)는 낭산 이후의 아들로 자는 내문(乃門), 호는 중재(中齋)로 영천시 청통면 애련리에서 태어났다. 3 세 때 천자문을 배우다가 밝을 명자에 이르러 말하기를, ‘해와 달이 합했으니 가히 밝을 명자라 할만하다.’고 했다고 할 정도로 일찍 문리(文理)가 밝았다. 심산(心山)김창숙, 중재(重齋) 김황(金榥)과 도의로 교류하여 학문적 난숙함을 더해나갔다. 교육을 할 때 각각 그 재주에 따라 가르치되 단계를 엄격하게 승급을 제한하고 학문적 분발심을 같도록 지도하였다.『 중재집(中齋集)』이 남아있다. 당 대 영천을 대표하는 유학자로 북산정사를 세워 그곳에서 많은 제자를 양성하고 침체된 유학을 부흥시키는데 앞장섰던 낭산 선생과 우수한 학자로 부친의 교육정신을 이어받은 아들 중재 부자는 영남유학의 끝자락을 이은 한말의 대학자로 영남유학의 사상적 정신적 문화를 마무리한 점에서 재조명 해 볼 이유가 있다고 여겨진다.
이번 50회분 원고를 끝으로 영천과 청도의 역사인물산책을 끝내게 되었습니다. 여러 문중에서 각별한관심과 애정을 보여주신데 대해 감사드리며, 영천과 청도에 훌륭한 인물들이 시대를 막론하고 수없이 많아 욕심은 앞섰지만 필자의 능력부족과 자료수집의 한계로 인하여 다수록하지 못함이 죄송스럽고, 차후 기회가 된다면 영천의 저변에 숨겨진 인물들을 더 발굴하여 지면에서 뵙길 기대해 봅니다.
감사합니다.